[한국사]백제금동대향로
- 최초 등록일
- 2006.05.16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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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금동대향로
-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찾아서...-
목차
없음
본문내용
부여 능산리 유적지에서 1993년 12월에 발굴된 백제대향로는 백제의 유물사 뿐 아니라 우리의 고대문화 연구에 획을 긋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백제대향로는 백제인들의 세계관, 우주관, 신령관 만이 아니라 고대 동북아인들의 세계관, 우주관, 신령관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와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만큼 문화적 연속성을 보이고 있다.
성왕 때 사비천도를 준비하면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향로의 제작 연대는 520년대 후반에서 530년대 전반기 사이로 추정된다. 이 향로는 천도와 함께 사비에 세워진 신궁(神宮)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유적지는 본래 사비의 신궁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신궁에서 계속 사용되다가 백제가 멸망할 때 부속건물 중 하나인 공방터의 수조에 황급히 매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 그 옛날 사람들의 순간적인 센스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그 유물하나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 단서를 제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백제대향로는 양식적으로 일부 중국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신선사상과 불교의 연화화생설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대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가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거나 불교의 공양구로 사용된 것과 달리, 신궁에 봉안되어 백제왕실의 건방지신을 위시한 조상신들과 각종 신령들을 모시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대의 ‘박산향로’는 본래 고대 중국의 전토제기인 두에 서역과 북방 산악도와 수렵도 등이 결합되면서 탄생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전국시대 이래 동서교류를 통해서 동아시아에 전해진 서역의 향료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한대의 박산향로는 원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서역과 북방의 산악도, 수렵도, 그리고 향료문화의 유입과 함께 향료를 태울 향로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산향로에 신선사상이 결합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전한 중기 무렵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무제 때 유교가 국교화되고, 같은 시기에 중국 서북부 지방에서 발원한 서왕모 설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한대의 박산향로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후 북위시대의 불교의 발흥과 함께 다시 공양구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위의 향로는 한대 박산향로의 기본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세부 양식에서는 서역의 요소들을 채용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향로 본체의 삼산형 산악도와 노신의 로제트 문양이 그 대표적인 것들로, 이들 요소들은 백제대향로의 본체 양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백제대향로와 북위 향로 본체의 기본 양식이 많은 부분 일치하긴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북위 향로의 삼산형산악도에는 수렵도가 없지만 백제대향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삼산 산악도를 배경으로 한
참고 자료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