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최치원 조사
- 최초 등록일
- 2006.05.14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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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치원에 대한 자료 조사입니다.
목차
최치원을 연구 주제로 삼은 이유
1.최치원의 생애
2.최치원의 사상과 문자관
3.최치원 작품선
맺음말
본문내용
羅末의 孤雲 崔治遠은 정치, 사상, 종교, 문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그 당시의 학계를 대표할 만한 우뚝한 존재였다. 그가 문장에 뛰어났던 만큼 그의 한문학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진척을 보여왔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한문학에 대한 연구단계에서 머물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사상과 철학을 지니고 있었으며 史學에 있어서도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등 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런 면모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그 까닭은 최치원의 문체가 연구하기에 까다롭고 학자들 사이에 연구의 합일점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문장이 자신의 생각만을 온전히 담았다기 보다는 他人의 요구에 의해 지어진 글이 많기에 그의 사상을 파악하기에는 그만큼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삼국시대에 東國文宗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사상의 깊이와 문장의 뛰어남을 보여주었기에 과제의 주제로 삼고 최치원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최치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려 한다.
1.최치원의 생애
1)당에서 얻은 명성 - 유학과 관료 생활
최치원은 6두품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이른바 `신라 말기 3최`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의 창건에 관계 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문왕의 國子에 선발되어 당나라에 유학가게 되었다. 이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요구에 의해 유학을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공부가 그의 유학사상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라 보인다. 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에 황소의 난 때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후 4년간 고변의 군막에서 공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을 정선하여 계원필경 20권을 지었다. 한편 최치원은 율수현위와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부근의 불교사찰을 많이 유람하였다. 그의 많은 시나 저술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동진시기 불교관계 내용은 이때의 영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소성에 있으면서 여러 사적지를 유람하거나 승려의 비문을 탐독하는 등 불교 관련 전적에 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때의 경험이 귀국 후 불교와의 접촉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 나은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문명이 높아졌으며, 이로 인하여 <당서,예문지>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최치원의 사상연구 최영성 아세아문화사 1990
(국역) 최치원 전집 최영성 역주 아세아 문화사 2000
최치원의 철학 사상 최영성 아세아문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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