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비스마르크
- 최초 등록일
- 2006.04.27
- 최종 저작일
- 2005.04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로이센 쇤하우젠 출생. 프로이센의 재상. 일명 "철혈재상"으로 지금의 독일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독일이 통일되면서 초대 총리가 되었다. 융커(Junker:`지방호족`이라는 뜻. 프로이센과 동부 독일의 지주계층으로 프로이센, 독일제국(1871-1918)과 바이마르 공화국(1919-33) 시대에 상당한 정치권력을 행사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소멸되었다. 이름 가운데 `von`이라는 글자가 있는 사람들이 이들이다.)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목차
비스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
[주요사건]
[정책]
본문내용
독일연방의회
1815년 빈 회의 이후, 독일 통일을 위하여 구성된 전독일적 조직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하노버 등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도시를 통합하여 조직된 연방이다. 각국 대표로 구성된 연방의회를 프랑크푸르트에 설치하였으며,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으로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목적은 침략에 대한 상호원조, 연방군의 설치 등을 규정한 연합규약을 제정하는 것이었으며, 각국은 독립국으로서의 권한을 가졌다. 1848년의 3월혁명으로 통일의 주도권이 한때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 옮겨져 무력해졌으나, 혁명 후 부활하였다. 모든 독일어권 국가들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나 당시 유럽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비협조적이며 독일어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과 연방의회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어권의 통일을 구상하게 된다. 이를 이룩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루게된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이후 체결한 1866년의 프라하조약으로 해체되었다.
베를린 3월 혁명
나폴레옹전쟁 이후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열기 속에서 구시대의 전근대적인 체제로 복귀하려는 귀족세력에 반대하여 독일내에서 일어난 독일민중혁명. 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혁명이 실패하자 국왕은 자유주의적인 독일통일운동도 억압하였으며, 국왕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의 황제(입헌군주제)추대를 사퇴하였다(1849).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나타나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독일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정책]
1. 철혈정책
1862년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되자 최초의 하원(下院)에서의 의회연설에서 “현하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鐵)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 말. 이 연설은 프로이센 의회의 자유주의자에 대항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무력을 통한 독일 통일을 수행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특징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탈리아의 카부르 수상이 이와 비슷한 표현을 이미 사용한 바 있다. 이 연설로 인하여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불렀다.
2. 소게르만주의
독일어권 국가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국가들을 통일하자는 주장. 다민족 국가에서 지배계급이 게르만족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및 다수의 독일어 국가들과의 통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통일 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추구하자 모든 독일어권 국가의 통일론인 대게르만주의가 축소된 독일통일 방식. 대게르만주의를 주장하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해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전쟁을 통하여 이를 구체화 시킨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