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백제의 요서경략설
- 최초 등록일
- 2006.04.26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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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 레포트입니다.
정말 공들여서 한거예요~
물론 에이뿔 받은 거구요^^
목차
Ⅰ. 머리말
Ⅱ. 요서경략(說)에 대한 여러 견해
Ⅲ. 요서경략 기사의 분석
Ⅳ. 요서경략설의 문제점
1. 기록 이외의 증거 부족
2.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만큼 항해술이 발달했었나
3. 낙랑 ․ 대방의 요서이동과 『송서』․『남제서』
Ⅴ. 요서경략설의 실체
Ⅵ. 맺음말
본문내용
. 요서경략설의 실체
백제의 요서지역 경략이 적어도 4세기 무렵에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대신 4~5세기에 조선(朝鮮)과 동질시되었던 낙랑교군(樂浪僑軍)이 요서지역에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진나라 말기에 낙랑이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는 『 양직공도』의 설명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양직공도』와 내용은 유사하되 주체가 다른 『송서』․『양서』의 기사를 착오에 따른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백제에 대해 설명하던 중 느닷없이 낙랑의 행적을 거론한 『양직공도』의 기사가 무언가 어색하다는 느낌은 여전히 지우기 어렵다. 또한 『진서』의 「모용황 재기」라든가 『자치통감』의 「진기」(목제 영화 2년조)를 보더라도 『송서』와 『양서』의 기사가 단순한 착오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백제가 어떠한 형태로든 요서지방과 관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경략하였다는 지역과 낙랑교군이 설치된 지역은 거의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진평군이 실재하였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유성과 북평 사이에 있었다는 『통전』「변방」1 백제조의 설명을 참고하면 낙랑교군이 처음 설치되고 이동한 경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송서』․『양서』와 『양직공도』는 한 가지 사실을 각기 다르게 표현할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은 3서(書)가 각기 사용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즉, 요서를 경략한 시기에 대하여 3서는 각각 ‘그 후’(『송서』), ‘진나라 때’(『양서』), ‘진나라 말기’(『양직공도』) 등으로 달리 표현하였으며, 행정구역명에 대해서도 진평군 진평현(『송서』), 요서 ․ 진평 2군과 백제군(『양서』), 요서 진평현 (『양직공도』) 등으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근거를 확보한 1차 사료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각 사서를 편찬한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어느 정도 작용하였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은 편찬 연대가 가장 빠른 『송서』가 가장 존중되어야 할 사료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과 수십 년 만에 일부의 내용이 다른 사람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객관성, 정확성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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