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제도]화백회의,화랑,신라vs고려.vs조선토지제도 정리
- 최초 등록일
- 2006.04.24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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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시험공부 하다 정리 하였습니다..
시험을 앞두신 분들이나 리포트 쓸때 참고 하세요
신라의 화백회의,신라의 화랑등을 골품제와 연관해서 정리 했고요..
신라의 토지제도,고려의 토지제eh,조선토지제도 정리했습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 비교 분석 하였습니다
목차
화백회의
화랑도
신라의 토지제도
고려의 토지제도
고려vs조선의 토지제도비교
조선의 토지제도
본문내용
화백회의는 연맹왕국에서 중압집권에 이어지는 국가 체제의 성립에 따라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6촌(村) 사람들이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다가 뒤에는 진골 이상의 귀족이나, 벼슬아치의 모임으로 변하여귀족회의 또는 백관회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화백회의는 국가에 중대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관이며, 또한 1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는, 다수결이 아닌 전원일치로 성립되는 만장일치 회의체제였다.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자 전원의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한다는 화백회의의 정신은 후일 고려시대의 도당회의인 도병마사 회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합좌회의는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발생하며고구려의제가회의,백제의 정사암 회의등이 있다.화백회의에 대한 사료는 수서 신라전에 보면 법흥왕때 불교수용의 내용이 나오는데,이시기에는 왕과 신하와 함께 회의에 정책을 결정한것을볼수있다.원성왕의 즉위과정을 보면 주원은 명분은 없지만 힘이 없어 왕이 되지 못하고 상대등인 김경신이 왕이되는데 상대등은 왕위계승의 순차적인 1순위였으며,그 권력또한 대단할거란 생각을 할수 있다.진덕왕때에는 왕이 참여하지 않은 순전한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인다.김춘추가 즉위하면서 성골은 끝나게 되며 그는 집사부를 만든다.집사부는 행정관부로 국가 기밀을 관장한다.따라서 화백회의는 권력이 약해지고 집사부의 중시의 권력이 커지게 된다.신라와 귀족의 권력은 집사부의 시중과 상대등의 관계를 보면 비례한다고 볼수 있다.통일전쟁 전후기에 최고의 관부였으며 중시는 왕권을 대변하였다.중시의 신분은 진골로 국왕의 측근이나 친족이였으며 임기는 3년이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