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삼국사기에 나타난 김부식의 역사관
- 최초 등록일
- 2006.04.16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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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1. 생애
2. 역사인식
3. 삼국사기의 성격
4. 사학사적 위치
본문내용
역사편찬은 이전 시대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으로서, 유교적 왕도정치 구현의 문화적 기념물이다. 동시에 그것은 중앙집권 완성의 표징으로서 왕실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려가 건국된 지 200여 년이 경과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묘청란 진압 이후 추락한 왕권강화를 위해 적극적 조치가 요구되었다. 더구나 성종 12년(993) 이후 계속된 거란 침입에 따른 사서의 소실로 현종 때에는 『칠대실록』 고려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의 실록.
등 몇가지의 역사편찬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더구나 여진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는 민족적 시련은 더욱 강렬한 국가의식을 요구했다. 또한 이자겸의 전횡과 여러 문벌귀족간의 갈등을 체험한 김부식은 현실비판의 자세가 더욱 강렬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척, 문벌간의 갈등에 대한 현실비판의식은 유교적 정치이념의 구현으로 승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외세압력에 대응할 국가의식은 뚜렷한 자아의식과 국가관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의 편찬은 묘청란 진압 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묘청란 정벌 후에 김부식이 문하시중 겸 감수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종은 서경전역(西京戰役)을 국론분열과 지방세력의 등장에 따른 중앙집권의 약화로 간주하였으므로, 새로운 국론의 통일과 왕실권위의 확립 그리고 정통왕가의 재창출을 위한 작업이 절실하였다. 더구나 인종은 외척의 횡포를 자신의 실정으로 생각했으므로,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으로써 현실비판과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으려 했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김부식은 왕의 중병 쾌유를 기원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인종의 중복된 혼인을 옹호하고 왕실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삼국사기』를 서둘러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 자료
신형식, 「김부식」,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비평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