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북한의 발해사와 후기신라사
- 최초 등록일
- 2006.04.14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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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2006년 1학기 고려대학교 한국사 수업시간에 제출한 레폿입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썼으니 믿으실 수 있을겁니다.
목차
1. 머리말
2. 삼국통일의 평가
3. 발해 연구사
(1) 건국시기
(2) 주민구성
(3) 지리 고증
(4) 대외관계
(5) 고고학적 성과
4. 후기신라사 연구
(1) 정치제도의 정비
(2) 후기신라의 경제
(3) 후기신라의 사회
(4) 후기신라의 문화
5. 맺음말
본문내용
원래 북한의 역사 연구는 남한에서와는 달리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적인 견해는 배제되고 공식적인 견해만이 표명된다. 대체적으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이르는 토론기에는 개인적인 견해들이 다양하게 표출되나, 최근에 올수록 집단성이 더욱 강화되어 연구 논문들에서 개인적인 특성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는 북한의 역사학이 점차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현재의 분단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때,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의 역사는 다른 어느 시기의 역사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부분이다. 이 시기에 발해와 통일신라 두 나라가 남북에 걸쳐 병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역사인식의 방향은 정치적인 정통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남북한 서로 미묘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발해사 논문들이 앞세우는 교시문 중에 김정일의 것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그만큼 북한이 발해사를 그들이 새롭게 해결해야할 과제로 인식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북한은 학자간의 이론(異論)이 거의 없다. 발해사가 갖는 민족사적 특수성 때문에 다른 것에 비해서도 발해사는 더욱 하나의 의견으로 집중되어 있다. 남한이 통일신라의 땅에 살았기에 통일신라의 연구에 관심을 쏟은 것처럼 북한도 그들이 사는 곳이 발해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발해사 연구에 관심을 쏟는다. 게다가 북한은 발해의 건국을 ‘창건’ 한 국가의 성립에 대해서 능동적 의미의 창건을 표제어에 사용한 경우는 현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 이외에 전근대에서 발해의 경우가 유일하다. 김영하, 「후기신라와 발해의 성립」『북한의 한국사 인식』[1], 한길사, 1990, p.197~198
이라 표현할 정도로 그 비중을 높이고 있다.
북한이 발해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그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발해의 일부였고, 발해의 민족사적 계승관계에 얽힌 문제를 밝히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늘날 그들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 더 타탕할 듯하다. 즉, ‘조선사’가 신라 중심적으로 되어 온 것을 비판하고, 고조선 - 고구려 - 발해 중심의 ‘조선사’적 맥락을 오늘날 그들 정권에 연결시키기 위한 점이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으로써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宋基豪, 「北韓의 渤海史∙統一新羅史 硏究」『北韓의 古代史硏究』, 1991
2. 정운용, 「북한의 통일신라사 서술」『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출판부, 1994
3. 한규철, 「북한의 발해사 연구」『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출판부, 1994
4. 김영하, 「후기신라와 발해의 성립」『북한의 한국사 인식』[1], 한길사, 1990
5. 신형식, 「統一新羅에 대한 《조선전사》의 敍述과 그 批判」『북한이 보는 우리 역사』, 을유문화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