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송시열과 산림에 관한 글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우암 송시열
3. 북벌론과 산림 등용
4. 송시열의 정치 생애
5. 송시열의 사상과 그 정치적 적용
1) 철학 사상
2) 정치 사상
6. 송시열에 대한 기록과 평가
7. 나오는 말 - 송시열의 평가와 관련하여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송시열(宋時烈)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붓으로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공자와 맹자, 주희를 비롯한 이른바 유교의 대가들만 오른다는 문묘에 배향 되었고, 전국 23개 서원과 9개 사우(祠宇)에 제향 되어 지금도 제사를 받고 있다. 문묘에 종사를 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 국가와 민족에게 문화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 높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문묘에 종사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비로서, 학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이나 거론되는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만큼 조선 역사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점철한 당파 정치의 한 가운데 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송시열에게는 공자나 맹자처럼 ‘자(子)`자를 붙여 ‘송자`라고 까지 불린 대학자이자 정치가라는 평가와 사대부의 이익에만 매달려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을 저해한 봉건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그를 비롯한 산림의 등용 배경과 송시열의 생애 및 업적, 그리고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통하여 송시열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2. 우암 송시열
인조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봉조하여 한국 주자학의 거유(巨儒)로 칭송받고 당쟁의 와중에서도 노론의 개조(開祖)가 되는 우암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 11월 12일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인조 11년(1633년)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으나, 높은 학식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뒷날 효종)의 스승이 되었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다. 그가 쓴 『장릉비문(長陵碑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친청파 김자점(金自點)이 청에 밀고해 사직하였다가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효종의 죽음 이후 2차례의 예송 논쟁에 깊이 간여하면서 남인과 대립했으며, 제 2차 예송에서는 남인에게 패배하여, 유배당하였다.
참고 자료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0.
조준하 외, 한국인물유학사 3, 한길사, 1996.
김종수,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솔, 2002.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동방미디어, 2001.
이준, 『‘예’로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던 대로(大老) 우암 송시열』, 한국조세 연구원, 2001.
이종호, 우암 송시열, 일지사, 2000.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역사스페셜, 송시열 왜 3000번이나 실록에 올랐을까, kbs1, 2001년 2월 24일 방송분,
『숙종실록(肅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