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진경 산수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03.17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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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경 산수화에 대하여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목차
<진경산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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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문화(文化)란,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만들며 사는 그 자체의 인위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마다 기후(氣候)가 각각 다르므로 그 풍토에 맞는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눈, 귀, 코, 혀, 피부(眼耳鼻舌身)와 (意識)의식의 쾌감을 찾아 헤맨다. 그 중에서 미술은 시각적인 쾌감, (중략)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문명의 틀 속에서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서양이 동양을 점령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도 제국주의에 압도당하여 현재 우리 주위에서는 우리 고유의 것 보다는 서양 것을 찾아보기가 훨씬 쉬운 지경이다. 원래 타(他) 문화를 (受容)수용할 때에는 제 문화의 그릇을 깨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 시대 서양 문화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인데, 그러려면 ‘우리의 그릇’이 어땠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의 파고가 일었다가 소멸하는 시간은 250년 정도 되며, 그 문화가 꽃을 피우는 절정기는 약 100여년 정도 된다. 하지만, 문화를 이끈 이념이 건전하면 절정기가 연장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념의 좋은 예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을 들 수 있다.
성리학이 고려 말에 한국에 전래된 이후,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은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유학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세종(世宗)代까지 신 지식층 일부만이 성리학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직까지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퇴계 이황 (退溪 李滉)선생은 이기이원론을 넘어서서 주자의 단계까지 주자학을 이해한 조선성리학의 대가이다. 이를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심화, 발전시키면서 우리 고유의 “조선성리학”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리학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그 내용이 난해하여 주로 시문서화(詩文書畵)를 통하여 쉽게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최고로 발전하는 동인이 된다.
이 시대에 안견(安堅)은 필묘 중심의 북송화법을 그대로 화원화풍으로 정착시켰으며, 강혜안은 묵법 위주의 남송화법을 사대부화풍으로 정착시키며 이 둘은 공존하는 상태에 있게 된다. 세종은 표면적으로 불교유산은 거의 소멸시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고, (중략) 화원(畵院)풍, 사대부(士大夫)풍의 그림 등을 부활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