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인문]김영랑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6.03.09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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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영랑의 생애, 작품분석, 작품감상 으로 된 레포트
목차
없음
본문내용
1.시인의 생애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강진면 남성리 탑골 마을의 북산 아래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던 14세 되던 해에 장남의 조혼 풍습에 따라 강진읍 도원리 김 검사의 딸 16세 김은하와 결혼한다.
그러나 첫 부인인 김은하는 당시 동남아 일대에 만연하던 유행성 감기에 걸려 결혼한 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비록 철모르던 나이에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결혼했지만, 그녀는 절세 미인인데다가 누나처럼 포근한 첫 부인을 몹시 사랑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어린 영랑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시심 속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계기가 된다. 「님 두시고」, 「그 색시 서럽다」, 「쓸쓸한 뫼 아페」등이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시들이다.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운 뒤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 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한 것이 영랑에게 있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였다. 유학 초기에 영랑은 한때 경북 문경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투사인 박열(1902~1974)과 같은 방에서 하숙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뒷날 그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최대의 후원자가 되는 박용철을 만나게 된 일이라고 할 것이다. 1921년 봄 박용철은 영랑보다 한 학기 늦게 청산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영랑과 같은 학년에 재학하게 된다. 당시 ‘학원의 수재’, ‘수리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박용철을 만나게 된 영랑은 같은 하숙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은 당시 문학에 관심이 적었던 박용철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영랑의 아호가 정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영랑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 유학을 떠나기 바로 전 해에 가 보았던 금강산 영랑봉과 고성 땅의 영랑호가 아주 마음에 들어 그것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 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마침내 영랑의 서정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 「모란이피기까지」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참고 자료
김학동, 『김영랑』, 문학세계사, 1993.
김흥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푸른나무, 2000.
박노균, 『김영랑』,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