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중국 천안문사태의 발단과 원인
- 최초 등록일
- 2006.01.25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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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89년4월 전총서기 胡耀邦의 죽음을 계기로 北京을 중심으로 하는 각지의 학생들은 民主와 自由를 요구하며 다시 일어서게 되는데 이 운동은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시민의 지지를 얻어 예상을 넘어서는 규모로 확대되어 한때 天安門광장이 "民主.自由"를 부르짖는 학생 시민으로 메워졌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民主.自由"가 사회주의的 民主 自由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체제의 위기를 느낀 鄧小平을 비롯한 黨. 政府의 지도자는 학생들의 운동을 "반혁명 폭난(동난)"이라 규정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특히 北京에서는 6월4일 천안문광장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 시민에 대하여 인민해방군이 출동하여 전차의 돌입과 기관총난사에 의한 무력 진압을 강행함으로서 다수의 사상자를 낳았다.
목차
천안문 사태
1. 서론
2. 본론
3. 결론
4. 나의 생각
본문내용
1986年의 「12.9 민주화운동」이후 출범한 鄧小平. 趙紫陽 체제는 당정분리,권한의 지방 이관, 정부기관의 개혁, 간부 인사제도개혁 등과 같은 제도상의 부분적 개혁만을 단행하는 소극적 정치개혁 정책을 추진한 반면 경제적으로는 가격.임금제도개혁 및 연해 지구 경제 발전 전략 채택 등 적극적인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개혁 정책이 경기 과열, 통화팽창, 원자재 및 상품 부족난 심화의 부작용을 파생시킴으로써 趙紫陽 중심의 개혁파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마침내 원로들의 지지하에 1988년 4월 李鵬이 趙紫陽 총서기가 겸임하고 있던 총리에 임명되고 경제적으로 긴축재정 실시를 주장하는 보수파의 영향력이 증대 되어 감에 따라 지도층에 의한 정치개혁 단행의 가능성은 더욱 더 희박해져 갔다. 여기에다 당정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고급간부자제들의 각종 특혜, 부조리의 만연으로 학생과 일반 지식인들의 당과 지도층에 대한 불만은 증대되어 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