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 정치사, 한국사, 독립운동사, 단군, 민족주의, 대종교]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 최초 등록일
- 2006.01.14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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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독립운동사에서 소외받은 홍암선생을 소개합니다. 그 밖에 그의 단군신앙과 단군민족주의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목차
1. 문제제기 : 홍암 나철, 그는 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과소 평가됐나?
2. 나철의 생애와 대종교의 중광
․ 나철의 생애
․ 대종교의 중광(重光)과 항일투쟁
3. 구한말 대종교(단군교)의 단군민족주의가 형성된 배경에 대한 분석
4. 대종교의 영향
5. 맺음말
본문내용
1. 홍암 나철, 그는 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과소 평가됐나?
나철(본명 羅寅永)은 대종교 교조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일제 침략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생애․활동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대종교와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역할과 한국독립운동사상 위치와 비중에 비해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금기시되는 인물, 혹은 거세된 인물이라고까지 얘기되는 홍암 나철은 누구였을까? 작가 조정래는 이병천의 장편소설 ‘신시의 꿈’ 추천사를 통해 나철이야말로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이라고 썼다. 가수 조영남도 20여년 전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나철이라는 역사 인물을 만났다면서 가장 억울한 인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권 기반을 조금이라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주변에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 투쟁과정을 통해 풍비박산이 되다시피 했던 애국지사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까지 왔다. 지난 2002년,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등이 주축이 되어 홍암 나철은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사후 86년 만의 일이다. 중국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철의 단군교, 즉 대종교의 역할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 원로였으니, 대종교는 상해 임정의 산파(産婆) 정도가 아니라 산모(産母)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 운동사의 빛나는 전과인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이나, 그 상급자로 총재였던 서일(徐一)도 대부분의 독립군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신자들이다. 대종교를 믿는 이들로 주축이 이루어진 독립운동이 물론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1919년 기미 삼일 독립선언보다 1년 앞서 무오 독립선언을 만방에 선포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