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장보고와 그 시대
- 최초 등록일
- 2006.01.05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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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보고와 신라 하대의 상황을 잘 살펴본 글.
목차
1. 당시 동아시아의 세계
2. 고향과 집안내력
3. `장보고`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
본문내용
1. 당시 동아시아의 세계
8~9세기는 동아시아 역사상 특기할 만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신라․당․일본은 이 시기에 율령제(律令制)를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때는 지방의 토호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가며 독자적인 실력을 쌓아 할거해 가던 때이기도 하였다. 신라는 8세기 말경에 오면 왕권은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현저히 약화되고 그들의 연합세력이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왕경을 중심으로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지방 토호들이 그들의 세력을 꾸준히 길러 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방분권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당(唐)나라는 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 중국의 각 지방에서 절도사(節度使)세력이 자라나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번진(藩鎭)이 생겨 중앙의 황제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일본도 9세기에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던 덴노우(天皇)의 권위는 약화되고 그 대신 귀족인 후지하라(藤原) 씨의 전횡으로 이어져 이른바「섭정정치」라는 새로운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 10세기 전반에 쇼해이(承平)․ 덴기요(天慶)의 난(935~941)을 통해 재지토호들의 「무사단」이 성장하여 영주제․봉건제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고대 통치체제는 무너져 가면서 11세기에 와서는 결정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다.
3. ‘장보고’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네 가지이다. 우리측 기록에는 활보, 즉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그리고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다. 중국측 기록에는 모두 장보고(張保皐)로 되어있고, 일본측 기록에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이름을 궁복(弓福)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동자이음인 궁파(弓巴)로만 되어 있다. ‘복’이나 ‘파’는 우리나라 남자 이름의 끝 글자에 많이 쓰이는 것들로 ‘궁복’이나 ‘궁파’를 우리말로 표기하면 ‘활보’나 ‘활바’가 된다. 신라시대에는 대체로 귀족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만이 성을 사용하였다. 평민․백성층은 성을 사용할 수 없었다. 분명 장보고는 성을 가질 수 있었던 계층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당나라에 건너가 사회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느 중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을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참고 자료
두목, 번천문집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