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외교사]카터시대의 미국외교정책
- 최초 등록일
- 2005.12.28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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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현대외교사의 일부분을 요약한 글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대외정책상의 현안 문제
Ⅲ. 카터 행정부 외교의 분열
Ⅳ. 미국의 대외정책
1. 파나마 운하 문제와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주의
2. 카터 행정부의 중동과 아프리카 정책
3. 공산국과의 관계 : 전략무기 제한, 아프가니스탄
Ⅴ. 나오며
본문내용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과격한 이슬람 학생시위대들이 “국왕을 죽여라! 카터를 죽여라! 미국을 죽여라!”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과격시위를 벌이다가 미국 대사관에 밀어닥쳤다. 순식간에 대사관 구역은 수백 명의 시위대로 가득 찼다. 이때 66명의 미국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을 체포한 시위대는 망명한 전 국왕 샤가 재판을 받기위해 이란으로 송환되면 납치된 미국인들을 석방시키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이란의 대미 적대감은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샤는 1941년 권좌에 올랐는데 총리였던 모사데그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미국은 왕당파 계열의 이란인들과 영국외교관들을 설득하려 왕을 왕위에 복귀시켰고 이로 인해 샤는 더욱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샤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져 이슬람 성직자들은 서양의 영향력에 분개하고 있었으며,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시민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는 비밀경찰들을 동원하여 강력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은 궁극적으로 반정부 세력의 규합에 도움을 주었다. 지미카터는 1977년 말에 테헤란을 방문하여 샤에게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카터가 내세운 인권의 추구와는 다른 것이었다. 결국 카터는 필요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1978년 들어 이란에서는 소요, 폭동 및 파업이 발생하엿다. 이것에 대해 국가안보회의 전문위원인 브레진스키는 이란군이 지금 반대파를 공격하는 쿠테타 상태임을 이유로 강력한 군사 대응을 주장했고 국무장권 밴스는 카터 외교정책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강권정책이며. 이란군은 징집된 병력으로 쉽게 와해될 것이기 때문에 미군은 개입은 옳지 않다고 했다. 당시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였던 설리반은 국무장관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샤는 자기 예하의 장성들도 수용 가능한 민간정부를 구성한 후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다.
참고 자료
미국현대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