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태조 왕건
- 최초 등록일
- 2005.12.14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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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건은 우리 나라의 첫 통일 국가였던 고려의 건국자이다. 태조 왕건은 877년 정월 14일 송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악지방 호족인 용건(나중에 왕륭으로 개명)이며 어머니는 한씨부인이다. 왕건에게는 탄생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고려사>, <제왕운기>, <개성왕씨계보> 등 여러 책들에 왕건의 출신에 대한 자료들이 수록되어있다.
목차
1. 왕건의 생애
2. 왕건이 활동하던 시기의 배경
3. 왕건의 정치 및 정책
4. 왕건의 가족
5. 관련 유적 및 유물
본문내용
3. 왕건의 정치 및 정책
통일 국가를 이룬 왕건에게는 두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첫째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 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비록 통일을 일궈내기는 했지만 통일국가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수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왕건은 정주의 유씨, 평주의 유씨, 경주의 김씨, 황주의 황보씨, 광주의 왕씨, 충주의 유씨 등 지방 호족의 딸들과 혼인하여 그들을 왕후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여기에다 통일 무렵에는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신주의 강씨 등이 더해져 왕건의 후비는 총 29명이 되었다.
왕건안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이러한 혼인정책은 적어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다.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왕건은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호족의 힘을 국가조직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혼인정책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 김은택 저 / 고려 태조 왕건 / 한국문화사 / 1996년
* 정성희 저 / 인물로 읽는 고려사 / 청아출판사 / 2000년
* 박영규 저 / 한권으로 읽는 고려 왕조 실록 / 들녘 / 1996년
* 박기현 저 / 손에 잡히는 고려 이야기 / 늘푸른소나무 / 2000년
* http://www.koreandb.net/KPeople/KPShow.asp?ID=0014027&Type=L
* 네이버, 엠파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