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조선시대의 호적제도
- 최초 등록일
- 2005.12.13
- 최종 저작일
- 2005.12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1. 호적제도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어떻게 파악되고 통제되며 살아왔는가? 현재 남아있는 많은 호적대장과 호구단자, 준호구, 호패 등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시대 국가권력에 의한 백성 통제의 여러 면을 볼 수 있다.
중세 봉건국가는 백성들을 몇 개의 신분층으로 나누어 통제하였다. 이에 따라 호적을 작성하는 방법이라든가 호패의 재질, 모양, 크기도 각각 달랐다.
호적은 일반 민중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법적 장치였다. 어떤 형사, 민사사건이 일어나서 사건을 심리할 때도 먼저 그 사람의 호구가 제시되지 않으면 접수가 되지 않았다. 호적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장치였다.
국가가 인민을 통제하는 장치였던 호적제도를 통하여 어떻게 백성들을 규제하였고,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일상생활은 어떻게 규제되었는가를 이해해 보기로 한다.
목차
1. 호적제도
2. 호적제도의 역사
3. 호적제도의 운용
4. 조선시대 호적 작성 절차
5. 호구 파악의 보조수단
6. 호적의 기재 내용
7. 호적의 용도와 기능
※ 참고자료
본문내용
2. 호적제도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구 파악 문서는 잘 알려진 ‘신라장적’은 ‘신라촌락문서’라고도 불리는데, 1930년대에 이 문서가 발견된 이래, 이 문서를 이용하여 신라시기의 사회구조나 경제관계를 밝히는 논문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아직 이 문서의 성격 자체를 규명한 글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장적 작성된 시기 신라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율령제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당나라의 균전제는 북위에서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위나라의 계장문서(計帳文書)에는 호구(戶口)와 노비(奴婢) 및 우마(牛馬)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마(牛馬), 상목(桑木) 등까지 파악하여 기록한 신라장적은 위나라의 영향을 받은 ‘계장(計帳)’문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토지와 인구를 동시에 파악하고 족정(足丁), 반정(半丁) 등 토지의 단위 자체가 정(丁)과 밀접히 관련된 고려전기의 제도하에서 호적 비슷한 문서들은 역시 호구와 토지를 동시에 파악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전기의 호적 자료는 실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구체적인 운영방식을 알 수가 없다.
참고 자료
조선시대 생활사 - 한국고문서학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