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학]동락리 전투
- 최초 등록일
- 2005.11.21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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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락리 전투에 대한 소개및 교훈 등의 내용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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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6.25 발발후 춘천지역에서 인민군의 공격을 3일간이나 막아냈던 국군 제6사단은 원주를 거쳐 이천~충주까지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계속하고 있었다.인민군은 원주에서 예비인 제15사단을 앞세워 7월 3일에는 이천과 충주의 중간에 위치한 장호원을 점령한 후, 음성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군의 진출이 계속될 경우에는 국군 제6사단의 전선이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김종오 사단장은 예비인 제7연대(연대장 중령 임부택)를 음성-장호원 방향으로 공격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기로 하였다.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충주로부터 음성에 투입된 국군 제7연대는 1대대를 음성에서 무극리-생극 방향으로, 3대대를 동락리-생극 방향으로 공격하게 하고, 2대대는 음성 북쪽의 부용산 일대에 배치하였다.이제 국군 제7연대(50년 말에 압록강 물을 떠오죠.)가 음성을 발판으로 장호원 방향으로 북상함으로써 장호원에서 음성방향으로 남하하는 인민군 제15사단과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들의 선두부대는 7월 5일 오후, 음성북방인 충북 중원군 신리면 동락리와 무극리 일대에서 마주치게 되었다.이때 동락리-생극 방향으로 공격하던 3대대장(소령 이남호)은 인민군의 대부대가 출현함에 따라 대대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연대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7월 5일 야간에 차량을 이용하여 음성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따라서 동락리 주민들이 보기에는 국군이 차량을 타고 멀리 철수하는 것처럼 보였다.국군이 철수한 후, 인민군은 동락리-신양리 일대까지 정찰대를 보냈으나 국군의 흔적은 없었으며, 주민들 역시 “국군이 차량을 타고 멀리 철수하였다”는 진술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제48연대의 본대는 차량에 탑승한 채로 경계대책도 없이 7월 7일 05시경 동락리를 통과하게 되었다.3대대의 철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연대장은 7월 6일 오후에 3대대를 방문하여 “다시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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