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외교사]독일 통일배경과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전쟁
- 최초 등록일
- 2005.11.18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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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 독일 통일과정에 관한 자료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독일)전쟁에
관한 자료입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때의 통일자료 아닙니다!!
목차
1. 독일통일의 배경
1)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일연방
2) 윌리암 Ⅰ세와 비스마르크 등장
3) 엘베(Elbe) 공국의 문제
4) 열강의 태도와 런던 회의(1864년 4월~6월)
5) 가슈타인(Gastein) 협정(1865년 8월 14일)
6)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1) 비아리츠(Biarritz) 회견(1865년 10월)
2) 프러시아, 이탈리아 공수동맹(1866년 4월 8일)
3) 프랑스, 오스트리아 비밀조약(1866년 6월 12일)
4) 전황
5) 니콜스부르크(Nikolsburg)의 예비평화(1866년 7월 26일)
6) 베네데티(Vincent Benedetti) 초안(1866년 8월)
7) 프라그 조약(1866년 8월 23일)
본문내용
1)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일연방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계기로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결정된 독일연방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들이 다시 제기 되었다. 독일 연방의 군사조직과 상호원조 문제도 재고되어야 할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비 독일지역에 관하여 독일 연방 국가들이 어떠한 책임을 부담해야 되느냐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독일의 여론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 북부독일의 자유주의자 :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의 학살자’ ‘독일의 억압자’로 묘사
․ 남부독일의 자유주의자 : 오스트리아 주도하에 대 통일을 주장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투쟁 주장
1859년 9월 독일민족 연합이 결정되어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이 크게 전개.
사실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의 경제적 기반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1843년 형성된 관세동맹이 그것이다. 관세동맹의 형성으로 그 구성 국가간에 무역이 증진되었고 공업의 발달이 촉진 되었다. 1840~1850년대에는 조세동맹에 가입하고 있던 하노버, 올덴부르크, 브륀즈빅크도 프러시아의 관세동맹에 가입하게 되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 연방지역이 하나의 관세동맹이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프러시아가 후퇴하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가 후퇴하고 있었다. 관세동맹의 관세들이 매우 낮아서 후진의 오스트리아 산업이 경쟁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독일통일과 피에드몬트의 이탈리아 통일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프러시아는 피에드몬트와 달리 이미 5대강국의 하나였을 뿐 아니라 관세동맹으로 하나의 경제권역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윌리암 Ⅰ세와 비스마르크 등장
1861년 윌리암 I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윌리엄 I세는 군사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59년 12월 국방상에 취임한 론이 군사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개혁안의 내용
․ 군대복무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한다는 것
․ 예비군의 독립성을 폐지한다는 것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