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근대중국의 배외운동 의화단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동양사를 듣는 학생들 리포트 주제로 좋을것 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의화단운동의 성격과 배경
1. 의화권의 기원과 성격
2. 의화단운동의 배경
Ⅲ. 의화단운동의 발전
1. 의화단운동의 발전
2. 전국의 호응과 확대
Ⅳ. 청정의 宣傳과 東南互保宣言
1. 청정의 선전
2. 열강의 대응
3. 동남호보선언(東南互保宣言)
Ⅴ. 신축조약(辛丑條約)의 체결
1. 청의 화의 모색
2. 열강의 이해 대립
3. 신축 조약의 체결
Ⅵ. 맺음말
본문내용
교안은 청나라 말기 중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던 반기독교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교안은 처음에는 외국의 종교에 대한 단순한 혐오감에서 저지른 폭력·폭동인 경우도 있었으나, 후에는 반교운동의 범위를 넘어 배외운동(排外運動), 즉 근대 중국의 반식민지화·반봉건화 과정에서 민족해방 운동의 중요한 일환이 되어 의화단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산동지역에서의 기독교와 관련된 저항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나는 중국 근대에서 기독교가 갖는 위치이다. 중국 근대에서 기독교 포교는 신앙의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국제정치의 문제이며, 전쟁의 문제였다. 청일전쟁 이후 산동성 전체 108개 주현 가운데 72개 주현이 교회의 거점이 마련되고, 크고 작은 교회는 1,300여 개, 15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기독교 포교와 열강의 중국침략과는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세력은 열강의 힘을 배경으로 불법을 일삼고 일반 민중에 압력을 가하여 도처에서 교안이 일어났다. 교안이 일어나면 관청을 압박하여 민중을 진압하였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는 일체불가분의 관계였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중국(對中國) 침략의 상징적 존재로서 중국 민중으로부터 격심한 적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포교 상의 문제였다. 중국에서의 기독교 포교는 유학적 교양을 가지고 있는 사대부계층보다는 서민층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도 신앙도 아닌 생활이었다. 그 때문에 선교사들은 종교적 정열대신에 현세적 이익이라는 효과적 수단을 쓴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당시 교회는 청왕조와 열강과의 역(力)관계의 반영으로서 일종의 치외법권적 위치에 있어서 중국관현은 여기에 용이하게 손대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중 가운데는 죄를 짓고 관헌의 추격․체포를 면하기 위하여, 분쟁의 상대에 보복하기 위하여, 노역이나 잡세의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기독교도가 되는 사람도 생겨났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민간소송에 대한 선교사의 개입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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