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제2차 한일회담
- 최초 등록일
- 2005.11.13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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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회담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 주장으로 말미암아 결렬되었다. 일본은 밀입국한 한국인을 강제송환하고 싶었으며, 이승만 라인을 침범하여 나포된 어선과 선언들을 송환해 받고 싶어 했고, 나아가서는 이승만 라인을 철폐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회담재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은 재한재산권의 불포기를 언명하였고, 한국도 근본문제인 재산권에 대하여 해결을 보지 않고 서는 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해 회담재개조건을 합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 12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머피 주일 대사는 이 대통령을 다음해 이른봄에 일본으로 초대하여 요시다 수상과 회담하도록 주선키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양국간의 질서 있는 관계야 말로 한국전쟁 수행에 있어 긴급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동선언을 계획하여 서로 반목하고 있는 두 나라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1953년 1월 6일에 이-요시다 회담은 열렸다. 이는 요시다에게 ‘일본은 40년간에 걸쳐 조선통치에 대하여 한국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시다는 ‘그것은 일본 군벌이 한 일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국 모두 공산주의의 침략위험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우호관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강조 하였고, 이승만은 요시다 수상이 한일 두 나라가 이웃나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고 만족해 했다. 이리하여 회담을 재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회담은 2월이 되어도, 또 3월이 되어도 열리지 않았는데 이유는 첫째, 일본측이 대한 청구권의 포기를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 청구권을 포기할 경우, 일본정부가 한반도로부터 되돌아 온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에 맞먹는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상당히 많은 금약이 될 것이므로 대장성이 난색을 표명하였기 때문이다.두번째 이유는 2월4일에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제1 다이호마루가 나포되었는데, 그 때 선원 1명이 사살된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냉각된 까닭이다. 3월 9일, 오카자키 외상은 김용식 공사에게 한국측에 다이호마루 사건과 어업문제 해결에 노력할 용의가 있다면 회담을 재개할 용의가 있음을 전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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