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시대]삼국지 등장인물 출신배경
- 최초 등록일
- 2005.11.13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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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후한말, 삼국지 등장인물에 대한 조사.
유비집단과 조조집단, 손권집단의 특징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목차
유비집단
조조
원소
손권 등
본문내용
조조(155~220)는 조숭(유력한 환관의 양아들)의 아들로 20세에 효렴을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황건적의 난 때 진압군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영제가 죽은 후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자 각지에서 원소를 맹주로 한 반 동탁군이 일어나 참전하였다. 그후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동탁이 죽고 이각곽사의 난 중에서 장안을 탈출한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로 맞아들여 대권을 장악하였다.
조조의 가계는 명문이었다. 조조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생활을 일찍 시작한 것도 가문의 후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의 가계가 환관 집안이었으므로 심리적인 콤플렉스가 심했을 것이고, 그만큼 구체제가 가진 위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조조는 원소에 대하여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조조가 가장 탐독한 책이 법가사상과 병법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조조는 후한 말기의 혼란한 사회는 예(禮)와 같은 도덕적 규율로 통치할 수 없다고 보고, 관자, 한비자와 같은 법가의 저술을 탐독했던 것이다. 황건 농민전쟁 당시 30세였던 조조는 기도위(기병대장)로서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제남국의 상이 된다. 조조는 30대 초반에 태수급으로 승진한 셈이다. 이 당시 조조는 8명의 장관을 파면하고 600여 개의 사당을 모조리 없애 관민에게 제사를 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귀신을 경원시하는’ 유가에서는 행하기 어렵다. 이 점은 그가 법가사상을 얼마나 강건하게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조조는 훌륭한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극도의 혼란기였던 삼국시대에서 조조의 경제정책은 부국을 위한 중농주의(경제 제일주의)와 강병을 위한 군사주의(군사 지상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병농일치의 추구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난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가장 앞서서 둔전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둔전제는 위에서 말하는 정치․경제 정책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이다.
조조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는 둔전제의 시행이다. 조조는 조정을 안고서 천하통일을 주도하였는데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 천자의 이름으로 다른 제후들을 누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하나의 정부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단점이 있다. 특히 낙양과 허도는 천하의 중심에 위치한 탓에 사방의 강호들의 침입에 대비해 군비를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었지만 전란으로 말미암아 토지가 황폐화되어 재원 조달의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대안이 바로 둔전제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참고문헌 『삼국지 해제』, 서동훈, 김운회, 장정일 공저, 김영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