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제주 4·3사건과 다랑쉬굴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5.11.05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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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사건과 다랑쉬굴에 관한 고찰
목차
■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 다랑쉬굴 제주 4·3사건 희생자 유해 발견 및 처리 일지
■ 다랑쉬굴 학살 사건의 증언
■ 다랑쉬굴의 대토벌 정황
■ 다랑쉬굴 희생자는 가족단위의 민간 피난민
■ 경찰과 행정기관의 ‘다랑쉬굴 사건’역사 왜곡
■ 다랑쉬굴 유해발굴 그후 10년
본문내용
1948년 12월 18일,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들은 군·경합동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숨이 막혀 참혹하게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생존을 위해 어지러운 시국만 지나면 다시 농사를 지으며 오손도손 살아보겠다며 호미와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깜깜한 굴로 숨어들었던 종달·하도리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44년이 지난 1992년 4월 2일, 제주4·3사건 연구소에 의해 그 참혹한 모습이 드러났으나 정부와 행정당국은 이데올로기로 덧칠하여 다시 한번 희생자들을 죽이고 말았다.
같은 해 5월 15일, 그 억울한 영혼들은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한 줌 재가 되어 뿌려졌다. 시신들이 누워 있던 동굴 역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동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틀어막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억울한 영혼을 달래지도 못하고, 진상규명도 이루지 못한 채 ‘다랑쉬굴 사건’을 역사의 벌판에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아직도 동굴 속에는 수습하다 남은 유골들의 뼛조각과 그들이 사용했을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두 번 죽임을 당해야 했던 영혼들의 원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다랑쉬굴 사건은 제주 4·3항쟁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입산 - 참혹한 죽음 - 방치된 시신 - 수장과 봉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제주 4·3항쟁의 모든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