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시대불교사찰 - 흥왕사
- 최초 등록일
- 2005.10.25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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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사찰 중 문종의 원찰이던 흥왕사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고려사절요 원문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본문
(1) 흥왕사의 시공과 그에 따른 신하들의 간언
(2) 흥왕사 창건 후의 연등회 및 사찰의 규모
(3) 흥왕사의 역사 및 ‘흥왕사의 난’
Ⅲ. 결언
본문내용
선종3년 후가 송에 다녀온 후 귀국하여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송․일본에서 수집해온 불경 및 경서 등 4,000여권을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후, 즉 의천이 귀국 후 국가의 지원아래 교장도감을 설치, 각국의 불서를 비롯하여 삼국과 통일신라 및 고려의 불서를 정리하여 속장경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흥왕사 역시 몽고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에 따른 참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전후복구와 원에 대한 과중한 공물 등으로 인하여 절의 복원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으나, 1273년 원 황제가 원나라 군사들의 사원 출입을 금지시키고 조정에서 사원을 수리하기 위해 사원조성별감을 설치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수리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때 흥왕사도 상당부분 복구하긴 하였으나 완연한 예전의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또한 왕실의 원찰로 지어진 그 성격상 정치적인 색깔을 많이 띄기도 하였다. 의천이 주지를 지낸 이후 왕실출신의 지주가 계속 역임하였으며, 개경 교외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그 자체로 정치활동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갔던 공민왕이 돌아와 궁전이 수축될 때까지 머물렀었고, ‘흥왕사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흥왕사의 난’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면 1361년(공민왕10년)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피난을 떠났다가,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김용, 최영 등이 물리친 후 개경으로 돌아와 흥왕사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은 왕지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이게한 후 다시 죄를 뒤집어씌워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야밤에 50여명을 이끌고 공민왕을 죽이려고 흥왕사로 쳐들어갔으나 왕과 얼굴이 비슷한 안도치가 대신 죽고 후에 최영 등이 토벌하여 평정되었다.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성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1070년 건축된 이 성은 길이가 약 4km정도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참고 자료
- 국역 고려사절요1, 민족문화추진회, 1968
- 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역사연구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