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분쟁]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문제-한국과 중국의 역사전쟁
- 최초 등록일
- 2005.10.18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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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문제-한국과 중국의 역사전쟁 에 관한
2003년부터 현재에 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레포트로 작성한 문서
목차
● 2003.12. 4-동아일보 민가 수백채 철거 국내성(國內城) 벽 복원 광개토대왕
비(碑)는 방탄 비각 안에...
▲유네스코 등록목적 유적정비 전시 방불... ‘중국고구려사’ 책 버젓이
● 2003.12. 4 동아일보 중 “고구려를 놓칠 수 없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진
● 2003.12. 5 - 동아일보 “만주는 우리땅” 중 말뚝박기
▲ 독(獨)-폴란드처럼 양국 역사공동위 통한 해결 바람직
● 2003.12. 9 - 동아일보 중국, 왜 고구려사 노리나
▲간도 영토 분쟁
▲간도 분쟁 왜 일어났나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 2004. 1.27 - 동아일보 ‘고구려사’ 실사구시 접근을
▲경직된 이분법 득보다 실
▲‘과거역사 공유’적극적 자세 필요
본문내용
▲간도 영토 분쟁
중국이 고구려사의 중국사 귀속을 위해 추진 중인 ‘동북공정’의 2003년 중점 연구과제 가운데 ‘간도 문제 연구’가 있다. 동북공정의 연구과제 중 현재 남북한-중국간 분쟁지역을 다루는 유일한 주제이다. 역사학자 박선영 박사(동아시아 현대사)는 “중국이 간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고구려사의 자국사 귀속 등 동북지역 역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 박사는 한국중국학회가 이달 중순 발간하는 반년간지 ‘중국학보’ 48집에 실릴 논문 ‘혈맹과 선린우호의 함수관계 사이에 남겨진 국경문제: 간도 문제를 중심으로’에서 한국과 중국간 간도영토 분쟁의 의미를 짚었다.
19세기까지 양국 주민 혼재....1909년 일이 철도권 대가 청에 넘겨
▲간도 분쟁 왜 일어났나
간도의 구체적 영역에 대해서는 한중간, 그리고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크다. 1909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간도협회약에서의 간도는 중국 옌벤 조선족자 치주와 대강 일치하는 북간도(또는 동간도)를 말한다.
간도는 영토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 청나라와 조선의 변경지대로 조선인들이 15세기 이전부터 이주해 개간하고 살던 곳이다. 그러나 청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지정해 조선인과 한족의 출입을 막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안봉선 철도(안동~봉천)개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주었으며, 1952년 옌벤조선족자치구(1955년 옌벤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어 현재까지 이른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식민지시대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협력한 대가로 간도 할양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1962년 중국이 지역 양도를 요구했으나 북한의 요구대로 백두산 천지를 분할해, 간도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더 이상 요구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박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간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던 이유는 간도가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세력이 접촉하는 완충지대이자 동서를 장악하고 남북을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구비한 요지이기 때문이다. 간도는 또 토지가 비옥하고 금 은 석탄 구리 철광 등 광석이 충부하며 장백산 북쪽 산기슭을 경유해 선양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중국 학계는 조선인의 간도 이주를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시행한 이후인 1860, 70년대의 근대 이민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 박사는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한 시점은 15세기 이전이며 봉금정책으로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조선인의 이주나 개간은 멈추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간도협약 이전 간도는 명확한 국경선 없이 양국 주민들이 혼재한 상태였고, 양국의 행정력이 동시에 존재했던 ‘복수 주권’의 지역으로 봐야 한다는 것.
또 동북지역은 단국조선, .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