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대구의 근대사-국채보상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9.28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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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대구의 근대사 개요
3. 국채보상운동
1) 국채보상운동의 배경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3) 일제의 탄압과 국채보상운동의 종말
4. 국채보상운동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3. 국채보상운동
1) 국채보상운동의 배경
1904년 러시아에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한편, 경제 구조의 재편에 착수하면서 침략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먼저 ‘농업 개발’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고 일본의 가난한 농업들을 이주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또 재정 고문으로 메카타란 인물을 보내 재정․금융․화폐 제도를 재편하고 한국에 일본 화폐의 유통을 강요하여 일본 자본과 상품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 틈에 일본인은 한국에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일제는 주요 지역에 금융 조합을 세우고 자금 융통을 제한하여 고리대에 의한 수탈을 부채질했으며, 『조세징수규정』을 만들어 세금 징수․세출입․금전 출납 등을 담당하는 재정 기구를 장악해 나갔다.
일제는 수탈 체제를 마련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관세를 담보로 1천만 원의 차관을 강요했다. 일제의 강요에 따라 국채와 차입금 등 각종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액은 1907년 1,300만 원, 1910년 4,500만 원으로 엄청난 액수에 달했다.
… 지금 한국에 제1회 300만원 차관은 어디에 쓰였으며, 제2회 1천만원 차관은 또한 어디에 쓰였는가. 나는 1개 경제 사업이 이로 말미암아 발기한 것을 보지 못했다. 또다시 이번에 제3회 1천만원 차관의 설이 있으니 그것이 장차 어떤 경제에 소비될 것인가 …슬프다! 일본은 빈한한 나라라. 외국의 빚을 꾼 것이 또한 이미 막대하거늘 백방으로 유혹하고 위협해 한국에서 전당 문권을 장악하여 억압에 억압을 더하고 구박에 구박을 더한다. 이에 한점의 생맥(생맥)도 남아나지 못하니 그 마음씀과 머리씀이 참혹하도다. 무릇 우리 조정 대신은 누구도 오직 이에 따라가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몰래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있으리오
참고 자료
신용하 외,『일제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 1994 아세아문화사
『대한매일신보』
변영주,『서우』제6호
http://www.daeg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