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가야의 멸망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5.08.10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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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가야의 멸망과정
①전기 가야 연맹의 해체
②5세기 가야를 둘러싼 국제상황
③6세기 이후의 국제관계
Ⅲ. 가야의 멸망요인
Ⅳ. 나오며
본문내용
가야는 백제, 신라와 함께 동시대에 건국되어 6세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강력한 국가로 존속하였다. 하지만 삼국처럼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제국(諸國)형태로 나뉘어 있었다. 따라서 외부의 침입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연합을 하였으므로 힘을 하나로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결국은 백제와 신라의 압박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는 가야의 멸망과정과 멸망요인을 통해 5~6세기에 걸친 당시의 국제관계속에서 가야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가야의 멸망과정
①전기 가야 연맹의 해체
가야는 나머지 삼국과 대등하게 발전하고 있었는데,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장 먼저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에 침범한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한 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일단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본가야가 이 전쟁을 계기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전쟁의 주체인 고구려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신라 자체의 힘만으로 가야 여러 소국들을 전부 병합시킬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때 가야 제국들이 고구려나 신라에 병합되지는 않았지만 그 힘이 상당히 약화되었는데, 이는 가야 고분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세기 무렵에 가야적인 색채를 내면서 발전의 모습을 보이던 김해 대성동․ 양동리․ 칠산동․ 예안리 등의 고분군들이 5세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고분의 규모가 급격하게 작아지고 신라 계열의 토기가 부장되고 있다. 이는 이 지역 가야 세력의 급격한 몰락 및 신라 영향력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가야는 멸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라 문화의 발전에 눌려 한동안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참고 자료
윤석효, 『신편가야사』, 혜안, 1997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2002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 고대사속의 가야』, 혜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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