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기독교회사2
- 최초 등록일
- 2005.07.30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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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부 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제 1 장 틀을 다져 가는 한국교회
제 2 장 초기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제 Ⅱ 부 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
제 3 장 일본의 신민화 작업과 민족주의 발흥
제 4 장 변천하는 사회, 갈등하는 교회
제 5 장 3 ․ 1운동 이후 부흥운동과 대 사회 ․ 문화운동
제 Ⅲ 부 도전과 응전의 시대
제 6 장 변화하는 한국교회
제 7 장 성결교 : 새로 부상하는 복음주의 세력(1930~1935)
제 8 장 자유주의의 도전과 보수주의의 응전
제 9 장 1930년대 신학: 자유주의, 진보주의, 정통주의
제 10 장 신비주의 부흥운동과 무교회주의
제 11 장 신사참배 반대운동
제 12 장 어두운 터널 그 한가운데 선 민족과 교회
제 Ⅳ 부 대립과 분열의 시대
제 13 장 민족의 해방과 남북교회의 재건
제 14 장 6 ․ 25전쟁과 종교 ․ 사회적 혼란
제 15 장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
제 16 장 에큐메니칼 논쟁과 통합 ․ 합동의 분열
제 17 장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의 재건, 대립, 분열
본문내용
제 1 부 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제 1 장 틀을 다져 가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외형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촉진된 전국적인 부흥의 열기와 성장은 하나의 힘으로 집결되고 체계화 되어 더 큰 힘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907년 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그 해 가을, 한국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하고, 감리교가 협성신학교를 개교하고, 또 동양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남북감리교와 감리교 협성신학교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세가 눈에 띄게 성장함에 따라 남북감리교에는 선교지역을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선교구의 확장은 곧 교세와 확장과 복음전파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세가 놀랍게 신장한 감리교는 늘어나는 교회 성장을 뒷받침해 줄 교회 지도자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신학교 설립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금까지 한 곳에 완전한 형태의 신학교 교사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서울, 평양, 인천 등의 지역을 이동하면서 신학반이라는 이름으로 단기적으로 교역자를 훈련해 오던 감리교가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중앙의 독립된 학교 체계를 갖춘 협성신학교가 설립되기까지 감리교 신학교육은 초기 단계를 거쳐 신학반 시대(1900~1906), 신학부 시대(1906~1908), 그리고 신학교 시대(1908~ )의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야 했다. 신학교육은 실시하고 있었으나 재정 문제로 자체 교사를 마련하지 못하던 협성신학교는 1911년에 부지를 마련하고 1911년 9월 27일에 임시 교사 규장각 건물에서 1년 2학기의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다 1916년에 서양 근대식 건물을 건축함으로써 명실상부 한국교회 목회자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