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 동래 읍성을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5.06.12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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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동래 읍성의 역사적 배경을 안다
2.고지도를 통해 동래 읍성이 담당했던 역할과 입지적 특징을 안다
3.현재 동래 읍성은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본문내용
조선시대 중종조에 편찬되었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옛읍성이 해운포에 있으며 동남은 석축이고 서문은 토석인데 둘레가 4,130척이며, 지금은 퇴폐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읍성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읍성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사』병조에 현종 때 동래군성을 수축하였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고려말에 동래성 수축에 관하여 기본적인 기록이 엿보인다. 『동국여지승람(1486)』읍성조에 인용되고 있는 이첨 기사에 의하면, ‘원구 박무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성축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 당시 읍성의 석축은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번 왜구의 침입을 겪고, 침략의 가능성이 점차 짙어진 가운데 동래읍성은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1592년 4월 14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한 군, 관,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격전지이다. 1731년(영조 7) 당시의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이 고장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읍성이다. 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의 문루(門樓)로 동문은 지희루(志喜樓), 서문은 심성루(心成樓), 남문은 무루(無憂樓), 암문은 은일루(隱一樓)가 있었다. 또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고, 앞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서문과 암문 및 북문에는 성문의 보호를 위해 옹성(甕城)을 부설하였고, 장대와 망루 그리고 15개소의 보루(堡樓)를 갖추고 있었다. 일제 때 시가지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도 민가가 점유하여 마안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만 성곽의 형태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