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비뇽유수
- 최초 등록일
- 2005.06.10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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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아비뇽 유수
1)바빌론유수의 발생원인
2)결과
3)의의
2.아비뇽유수와 교회 대분열 그리고 공의회주의의 대두
본문내용
근대에 들어오면서 국가주의의 발달로 그리스도교적 보편주의 정신은 점차 약화되고 전제군주의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간 교회에 성실하던 국가가 부국강병을 위해 교회의 재산을 탐내었고 또는 교회를 이용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박해하여 야망을 채우려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은 유럽의 여타국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톨릭의 딸임을 자랑하던 프랑스마저 가톨릭에 대해 박해가 가중되었다. 즉 세속 군주들은 종교마저 국가정책의 노예로 삼기를 원했고 군비확장을 위해 막대한 교회재산을 노렸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오랫동안 종교개혁으로 시달린 가톨릭으로서는 힘이 너무나 약했다. 이른바 절대 왕정하에서 신성불가침의 왕권신수설은 이 시대를 지배하였고 세속군주들은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려 하였다.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상황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카페왕조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졌다. 즉 과거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이 교황권과의 관계에서 가졌던 역할이 이제는 프랑스의 왕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현상에는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인으로 추기경들을 프랑스사람들로 임명하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그 다음 교황인 클레멘트 4세 역시도 프랑스인이었다.공정왕 필립 4세부터는 국왕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당시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과 대립을 하게 되었다. 1295년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상황에 돌입하게 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평민들의 대표를 의회에 등원하도록 하여 모든 시민들의 지지를 규합하였다.
참고 자료
서양 중세사강의
서양사 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