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갑신기의 근대변혁과 민족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6.06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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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언
2. 농민전쟁기에 있어서 농민의 생활상
3.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그 역사적 성격
1)교조 신원 운동의 전개
2)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성격
4. 갑오농민전쟁의 전개와 그 역사적 성격
1)고부봉기
2)제1차 전반적 농민봉기(3月起包)
3)집강소체제
4)제2차 전반적 농민봉기(9月 起包)
5.결론
본문내용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청일전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이라는 대 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 게 아니라, 농민혁명의 내용 자체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 후 지금까지 100년에 면면히 흐른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 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近代化)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爲政斥邪: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 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 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