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편전쟁 전 중국
- 최초 등록일
- 2005.06.02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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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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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청의 건국(建國)
2)왕조체제의 완성
3)학술사상(學術思想)
4)청의 정치조직
5)사회(社會)ㆍ경제(經濟)의 개황(槪況)
6)실질적(實質的)인 정치상(政治上)
3.결론
본문내용
청대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한학(漢學)의 중견인물인 소위 대단이왕(戴段二王 [戴震ㆍ段玉裁ㆍ王念孫ㆍ王引之])은 모두 이 무렵의 학자들이다. 대진은 건륭시대의 거인(擧人)으로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수를 맡았었고 단옥재와 왕염손은 건륭시대의 진사(進士)이고 왕인지는 왕염손의 아들로서 가경(嘉慶)시대의 진사이다. 이들의 연구방법은 상당히 과학적이었으나 아깝게도 그 과학정신은 학문분야에만 그치고 당사의 중국정치 사회생활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었다. 대진의 철학이론도 서방의 벤삼(bentham)파의 공리주의에 접근하고 있기는 했으나 당시의 일반사람들은 그의 고증방법에만 주의를 하고 그의 철학상의 이론에 대하여는 주의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건륭시대에 학술을 장려한 까닭은 민지(民知)를 계발한다느니 보다 차라리 우수한 인물들의 총명과 재능을 고서중(古書中)에다 묻어 버리려고 하는데 있었다. 건륭제가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만들어 논 것은 명태조가 팔고문(八股文)을 써서 민지를 덮어둔 것과 거의 비슷한 수단이다. 그는 한편으로 사고전서관을 개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금서령(禁書令)을 반포하여 무릇 명말청초의 만한양민족(滿漢兩民族)의 흥쇠(興衰)에 관한 저술은 모조리 역서(逆書)라하여 일률적으로 없애버렸다. 건륭 39년(1774년)부터 46년(1781년)에 이르기까지 소위 역서라는 것을 없앤 일이 24차이고, 이때 없애버린 서적은 530종으로서 도합 13,862부에 달하였다. 아직도 그런 서적이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여 56년(1788년)에 이르러 다시 유시를 내려 계속하여 색출케했다.
☞ 당시 서양의 학문은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경험론이 주류였다
참고 자료
「개관 동양사」, 동양사학회 편
「중국최근세사」제1권, 김준엽, 서울, 一湖閣
「중국근대사」, 이양자 역, 삼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