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 체제
- 최초 등록일
- 2005.06.02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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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파리강화회의
(1) 독일에 대한 응징
(2) 다른 패전국과의 강화조약
3. 베르사유체제의 문제점
4. 국제연맹의 탄생
5. 독일의 배상문제
6. 유럽의 집단안전보장체제
(1) 제네바의정서
(2) 로카르노 조약
(3) 워싱턴 군축회의
7. 맺음말
본문내용
2.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은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 평화에 대한 갈망이 불길같이 솟아오른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의 뒷수습을 매듭짓고, 영구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1919년 1월 18일 전승국 27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는 윌슨의 ‘14개조항’을 그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었는데,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자유와 자치에 입각한 평화로운 세계질서수립이었다. 하지만 이상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이른바 ‘윌슨 외교’는 전후의 현실 세계와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강화 회의에 참석한 모든 나라가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끌레망소)가 주도해 나감으로써 같은 승전국이라고 해도 이 세 나라를 제외한 약소국들은 본회의에서조차 제외되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므로 패전국의 입장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 회의가 비밀회의 형태로 진행되면서 자연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우선시되고, 모든 문제는 참가한 세 명의 정치적 수완에 따라 결정되곤 했다.
(1) 독일에 대한 응징
난항이 거듭된 끝에 마침내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승전국들은 비록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전후 복구와 안전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도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최소한의 합의는 승전국 모두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원칙을 담고 있었다. 즉,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제1차 대전을 도발했으므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 辛舜基,『一般政治史』, 大旺社 , 1996
․ 이기택,『국제정치사』, 일신사, 1997
․ 김주한,『서양의 역사 -갈등의 2천년-』, 역사교양사, 1998
․ 閔錫泓,『西洋史槪論』, 三英社, 2003
․ 폴케네디,『강대국의 흥망』, 韓國經濟新聞社, 2002
(제6장 양극세계의 도래와「중위권 국가」의 위기 Ⅱ:1919~1942 / 전후의 국제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