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6.01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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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서경천도운동의 역사적 배경
2) 서경천도운동의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고려인종(1122년~1146년) 당시 고려는 ‘이자겸의 난’으로 인한 내부적인 혼란과 함께 북방의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서경출신의 승려 묘청은 당시의 고려가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은 현재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의 지덕(地德)이 쇠약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새로이 지덕이 충만한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하게 되었고,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과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대•내외적으로 지속된 혼란 등으로 인해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 등이 횡행하였고 이러한 불안한 정세 속에서 묘청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擧動:임금의 나들이)하였으며, “새로운 궁을 세우면 천하를 통일하고 금나라의 항복도 받아낼 것” 이라는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게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유신들과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으며, 민심 또한 이탈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인종은 서경천도를 중지하는 명령을 하게 되고, 이로써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이후 묘청은 11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 및 분사병부상서 유참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잡아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으로 연호는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였다. 이와 같은 묘청의 반란에 부딪힌 고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師)로 하는 토벌군을 파견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