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용비어천가
- 최초 등록일
- 2005.05.27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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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용비어천가의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담은 자료입니다
편집도 아주 깔끔하게 잘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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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직접 다운받아보시면 전혀 깨진 글자 없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용비어천가
ⅰ. 제작 동기
1. 외적 동기
2. 내적 동기 (세종의 입장)
ⅱ. 편찬 경위와 체제
ⅲ. 용비어천가의 내용 및 구조
1. 용비어천가의 전체 짜임
2. 장과 행의 구조
ⅳ. 용비어천가의 서지사항
ⅴ. 악곡으로서의 용비어천가
Ⅲ. <용비어천가>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렇다면 제작 주체인 세종의 입장에서 <용가>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선초 아송문학(���j)의 출현 동인 중, ‘기득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표어는 자기 계층 내부의 절대 명제이었을 뿐, 치자(C� 계급으로서의 도덕적 명분상, 대외적으로 표방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세종이 최고 통치자로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 바로 국가의 ‘이념’ 문제였다. 표방한 이념에 혼란이 생길 경우 왕조의 영속이라는 지상 과제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건국의 주체세력은 주자성리학(
i�gj)으로 무장하고 있던 신흥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이 도모한 왕조 교체 및 이성계의 즉위는 선양(; )의 형식을 빌긴 했으나 무력을 앞세운 것으로서, 주자가 말한 윤통(J�일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세종 자신의 부왕이었던 태종 역시 윤통임은 태조와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 권근을 비롯한 건국 초기의 사상가들이 악장을 지어 올리는 등 그러한 약점을 가리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다.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태조의 왕자적(
?�r) 비정통성’에 ‘태종의 왕자적(
?�r) 비정통성’이라는 부담이 가중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 자신 또한 적장(k6)이 아니라는 결정적 흠을 지녀, 건국의 이념과 배치되는 현실이 건국 이래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짐으로써 모순과 역리( \)의 현상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자칫하며 ‘왕조 영속’이라는 지상 과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건국 이래 3대에 걸쳐 반복된 ‘윤통’의 모순적 현실을 한꺼번에 해결한 방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대 임금의 일을 악장으로 가송할 수 없다’는 세종 스스로가 내세운 원칙에 의해 자신의 일까지 <용가>에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태조 · 태종에 대해서 만이라도 이러한 시비의 가능성으로부터 차단시킬 필요성은 절실했던 것이다. 세종 자신은 스스로가 무력이나 술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왕(
?)에 의해 선택되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조 · 태종에 대한 윤통 시비의 가능성만 해소된다면 큰 부담 없이 왕조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양적 · 질적 측면에서 목조(�%)에서 환조(r
%)까지 사조(�%)의 활약상이 태조 · 태종에 있음이 분명하다. 관점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인 이태조보다 오히려 부 주인공격인 태종(W
�이 훨씬 혁명적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장덕순의 견해를 참조한다면 태종의 왕자적(
?�r) 영웅상을 강조함으로써 태종에 대해서는 물론 세종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윤통(J� 시비를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용가>에 상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효과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조선 왕조 영속이라는 지상과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이종출, 한국고전시가연구, 서울: 태학사, 1989
정인지 외, 용비어천가, 서울: 솔출판사, 1997
박찬수, 용비어천가 연구, 충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