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어중문] 산수시인-사령운과 그의 시 및 도연명과의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5.05.17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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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용으로 사용되었던 자료인데,
성심성의껏 만들었습니다.
목차
1.사령운에 대하여
2.대표적인 시 감상
3.시의 구절에서 살펴 본 자연에 대한 표현
4.산수시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의
5.도연명의 시와 사령운 시의 비교
본문내용
1.사령운에 대하여
사령운(謝靈運 : 385~433)은 진군(陳郡) 양하(陽夏 : 현재 河南省 太康縣)에서 태어나서, 회계(會稽 :현재 浙江省)으로 이주해 살았다. 동진(東晉)때 강락공(康樂公)봉작을 계승해, 사강락(謝康樂)이라고도 불린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문장의 아름다움은 안연지(顔延之)와 더불어 제일이었다. 동진 때 관직이 상국종사중락에 까지 올라갔다. 남조의 宋에 들어서는 후작으로 내려갔으며, 영가태수, 시중, 임천내사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사령운이 그토록 산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문학 작품을 통해 표출하였던 것은, 그의 성장 배경과 정치적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빚은 결과라 하겠다. 먼저 그가 성장하고 후에 칩거하기도 했던 주된 생활공간이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명승지 가운데 하나였기도 했고, 또한 어렸을 때 두명사(杜明師)라는 도사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것도 그가 자연스레 산수에 대해 애정을 갖게 하였으리라 본다. 그는 정치적 권세에 열중했고 또한 문벌가문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중용되지 못함에 따라 마음속에 늘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었다. 이에 비록 몸은 관직에 있었지만 정무를 돌보지 않고 마음대로 산수를 유람했다. 후에 결국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벌목하여 길을 내고 기묘한 정치를 찾아다니는 것으로써 정치적인 불만의 정서를 스스로 위로했다. 만년에는 탄핵을 받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군사를 일으켜 항거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광주로 추방되었으며 이후 피살되었다.
참고 자료
사령운시선, 도연명시선, 난세를 꽃피운 시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