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제 1,2 차 중영전쟁
- 최초 등록일
- 2005.05.13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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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Ⅰ.제 1차 중영전쟁
1. 배경
1) 청조사회의 변화
2) 영국동인도회사의 활동
3) 광동무역 체제와 중영교보
2.중영무역의 전개와 청조의 아편대책
1)중영무역의 전개
2)아편문제와 청조의 아편대책
3.임칙서의 강경정책과 전쟁의 발발
4.불평등 체제 조약의 성립
Ⅱ. 제 2차 중영전쟁
1.배경
1) 배영운동의 격화
2)조약 개정 문제
2. 애로우호 사건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중국 근대사의 기점을 제 1차 중영전쟁으로 잡는 것은 중국인 학자나 서양인학자 사이에서 대체로 일치되어온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최근에 이르러 일부 논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명말(16세기 후반) 혹은 명청교체기(17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잡아야 한다는 시각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제 1차 중영전쟁을 기점으로 삼는 경우, 대부분의 서양인 학자들은 ‘전통적’ 중국은 비로소 정체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변화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국제적 고립상태가 종식되었다는 인식을 보이는 한편, 중국인 사학자들의 경우에는 제국주의 침략사가 시작되며, 따라서 이후의 중국사회는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했다고 본다. 이들은 1차 중영전쟁을 획기로 보는 점에서는 일치하되 외인(外因; ‘서구의 충격’)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서로 상반되고 있다. 16세기 후반, 혹은 17세기의 명청교체기를 근대사의 기점으로 잡는 경우, 혹자는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맹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그 근거로 삼기도 하고, 혹자는 이 시기가 내부적으로는 만주족이 흥기하여 청조가 성립되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서양인이 도래함으로써 서양학문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따라서 19세기에 서양의 충격과 효과가 특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1·2세기전에 진행되기 시작한 변화과정이 확대, 강화된 것일 뿐이라 한다. 비슷한 논리이지만 외인(外因)보다는 내인(內因)을 훨씬 중요하게 보면서 명말부터 이미 시작된 근본적 변화는 청대, 혹은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므로 명청은 하나의 시기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1차 중영전쟁은 이러한 중국사회의변화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근대는 ‘서양의 충격’에 의해 시작된 것도 아니고 서양의 추종도, 서양의 극복과정도 아닌 중국 나름의 독자적 역사를 전개해 왔기 때문에 그 흐름을 독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강좌 중국사 - 제국 질서의 완성
/지식 산업사, 서울대학동양사학연구실 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