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극] 대중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최초 등록일
- 2005.05.13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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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통해 본 대중극
목차
1. 대중극의 발전
2. 극의 구성
3. 인물분석
4. 작품분석
5. 작품의 의의와 미흡한 점
본문내용
1910년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임선규는 일찍이 부친을 잃고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어느 부농의 지원으로 한학과 신학을 배웠다. 강경상고(일본인들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한 특수학교) 재학시절에 희곡 '수풍령'을 써서 '개벽'지 현상 문예에 당선되었고, 논산극장에서 조선연극사의 순회공연을 보고는 연극에 열정을 품게 되었다. 고교졸업 후 서울로 상경한 그는 자신을 매료시킨 조선연극사의 주연배우 강홍식을 찾아가게 되고, 극작가 겸 배우로 생활하게 된다. 1932년 '양자강의 범선'을 쓰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한 이후 배우 문수일의 막내딸 문예봉을 만나 1937년 결혼을 하게된다. 1932년 15세의 나이에 나운규의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 캐스팅되었던 문예봉은 한국 최초의 토킹영화 '춘향전'에 캐스팅되면서 일약 스타가 된 반면 임선규는 폐결핵에 걸려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상에서 그가 집필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원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이었던 동양극장에서 1936년 7월 전속극단인 <청춘좌>에 의해 초연되었고 광복 전 우리나라 연극사에서 최다 관객동원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성공이후 유랑극단들이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으로 공연하기도 한다. 인기작가로 떠오른 임선규는 극장측의 부탁으로 '청춘송가', '정조성', '유정무정' 등의 작품을 쓰게 되었고 이 작품들 역시 연속 만원을 기록하게 되면서 경제 사정도 좋아지고 폐결핵도 호전되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던 그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은 그의 대뷔작 '수풍령'을 상연할 때였다. 일제 고등경찰은 이 작품이 민족주의 작품이라고 하여, 임선규가 피검되고 논산 생가에까지 가택 수색이 실시되었으며 고향 가족들까지 취조를 받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