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5.18 광주민주화항쟁
- 최초 등록일
- 2005.05.12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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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18 광주민주화 항쟁에 발생원인과 과정 그리고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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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 민주항쟁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진공상태를 메우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계기로 장차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ꡐ제5공화국ꡑ이다. 그러나 ꡐ제5공화국ꡑ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시민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사망자 154명, 행불자 47명, 부상자 2,711명 그리고 연행, 구금자가 509명 등 총 3,4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공식통계이며 수사기간중의 불법연행자만 하더라도 3천여 명이었으며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광주민주항쟁은 그·당시에는 패배한 항재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하여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키는 견인차로 등장한 것이다. 5·18이 민중항쟁으로 올바른 성격규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 당시 정부에 의해 ꡐ5·18ꡑ이 ꡐ광주사태ꡑ, ꡐ폭동ꡑ, ꡐ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ꡑ등으로 발표된 뒤 광주시민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 국민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88년 6공 정권이 들어선 뒤 국민화합을 모색한다는 미명하에 ꡐ광주민주화운동ꡑ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13대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 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써 광주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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