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조선공산당과 대중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5.0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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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 론 -
- 본 론 -
1) 인공과 미군정
2) 민전결성
3) 공산당과 미소공위
4) 신전술 -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
5) 3당 합당과 남로당 탄생
6) 미소공위 결렬과 남로당의 쇠퇴
- 결 론 -
본문내용
- 본 론 -
1) 인공과 미군정
45년 8월 22일의 1차 개편으로 건준은 8월 1일 창립 때 제기했던 사명과는 달리 좌경정부지향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공산당에 의한 건준 변질 공작이 공식화한 것이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되는데 여운형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국내 혁명 세력을 주축으로 해외 세력을 포함시켜 정부를 조직한 뒤 미군을 맞으려 했다. 이와 같은 여운형의 구상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박헌영 계열은 건준과 연합하여 이를 좌경정권으로 변환한다는 전술로써 정권 문제를 타개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월 4일 여운형, 박헌영, 허헌, 정백 등은 경성의전병원 허헌의 병실에서 인민공화국(인공) 창건과 구성 인물 선정 문제 등을 협의, 비 오는 6일 오후 늦게 경기여고(지금의 창덕여고 자리)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45년 9월 14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발표한 선언문과 강령, 시정방침 등은 그 내용이 좌경정부지향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 등을 포함한 임정은 이의 제의를 일축하게 되는데 이승만, 김구 등을 참가시킨 것은 인공의 좌경적 색채를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공의 급조는 당시의 일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얼른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갑자기 정부를 만들어 낸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미군 상륙을 앞두고 '국내외 혁명 세력을 망라한 정권'을 스스로 수립한 것은 이를 기정사실화시켜 군정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 통치기구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 그를 대신하여 군정과의 관계를 맺으려 했다. 둘째, 중경 임정과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인공 조직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이 제휴한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같았던 데서였다고 본다. 여운형은 민족운동가로서의 상징적인 존재였지 자기의 조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공산당이란 조직적 바탕이 있는 박헌영과 손잡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자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1』,「조선공산당 남로당의 변혁노선과 활동」, 풀빛, 1991
박일원, 『남로당의 조직과 전술』, 「남로당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 세계,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