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관
- 최초 등록일
- 2005.04.07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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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의 국제통역관
2. 역관무역의 시대가 전개되다
3. 양반의 부를 능가한 역관의 부
4. 선진문물을 수입하다
본문내용
1. 조선의 국제통역관
<역관상언등록>
역관은 조선왕조의 외교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역원과 승문원을 설치하여 인접국가의 언어, 특히 중국어에 대한 학습을 장려했다.
역관은 잡과 중의 하나인 역과를 통해 뽑았다. 3년마다 실시된 역과에서는 중국어 13명, 몽고어·일본어·여진어(청국어) 각 2명씩을 뽑았다. 합격자에게는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주어 관청에서 권지(權知) 관직 임명 전의 관리후보자
로 일하게 하다가 자리가 나면 실직을 주었다. 역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품계는 중인층 관리로는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정3품의 당하관으로 역관은 중인층에서는 상급기술관이었다.
조선중기 이래 역관은 점차 세습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역관 집안에서는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통해 합격률을 높였다. 후기에 이르면 한 집안에서 역관을 배출하는 추세는 일반화 된다.
<통신사 행렬도>
역관들은 부가 보장되는 중국사신행이나 일본통신사행을 따라가기 위해 매우 치열하게 경쟁했다. 특히 정기적 또는 수시로 파견되는 중국사신행에 참가하려 했다. 역관들 사이, 역관 가문들 사이에는 중국에 가기 위한 상호경쟁이 결사적으로 벌어졌다. 한 집안에서 여러 대에 걸쳐 역관을 집중적으로 배출하면 그만큼 중국사신행에 따라갈 기회가 많아졌다. 특히 17세기에 역관무역이 본격화되면서 상호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 상호경쟁은 역관사회를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어, 역관의 세습도와 집중도를 높인 가문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가문은 탈락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역관을 내는 가문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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