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인도의 비협력 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3.23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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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레포트이자 발표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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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계약 노동자 이민의 폐지
2 참파란 사띠아그라하
3 아흐메다마드 사띠아그라하
4 케다 사띠아그라하
5 소금 대행진
6 로울라트 사띠아그라하
7 잘리안왈라 공원 대학살
본문내용
남아프리카에서 비폭력 투쟁으로 인종차별의 현실을 극복하는데 어느정도 성공한 간디는 부인과 함께 1914년 7월 18일 영구귀국하기 위해 영국행 배를 탔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정치력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됨도 남아프리카에서 줄기를 잡았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사띠아그라하 투쟁으로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였기에 인도에서 독립운동의 성공을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서 수천 명의 가난한 자와 문맹 노동자들이 진리를 쫓아 담대히 행진하고 투옥되고 채찍질 당하고 사살 당하는 장면들을 지켜본 그로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대중을 통한 대중을 위한 사띠아그라하 운동의 실용성과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다.1915년1월9일 간디는 봄베이에 도착했다. 그는 그의 귀국환송파티에서 인도는 자신에게 생소한 나라라고 하였다. 그는 1915년 귀국하기까지 거의26년을 인도 밖에서 보냈기 때문이다.그는 귀국하고서도 정치무대에 뛰어드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조언자인 고칼레가 그에게 그런 당부를 했었기 때문이리라. 고칼레는 인도 사회 봉사자를의 모임에 간디가 참여하기를 바랬지만 그 단체의 몇 몇 구성원들은 간디와 자신들 사이의 이상과 현실문제 해결방법에 차이를 발견하고 그의 가입을 반대했다. 인도 사회 봉사자들의 모임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이 최저생계비로 살면서 인도사회를 위해 자신들의 전부를 바치는 조직체였다. 고칼레가 죽은 후 그는 다시 가입을 시도했으나, 일부 구성원들의 대립으로 스스로 가입을 철회하였다. 이 무렵에 고칼레가 죽은 것이다. 고칼레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는 맨발로 일년동안 전국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1915년 1년 동안 그는 정치를 멀리하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연설이나 기고문에서 개인과 사회개혁에만 몰두하고 정치적 문제는 피해왔다. 그의 자제는 스스로 택한 침묵이었고, 이것은 인도의 상황을 바로 보고 공부하기를 결심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님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