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숙종년간의 정치 동향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5.02.05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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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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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ⅰ숙종이전의 정치
ⅱ숙종대의 정치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Ⅲ.결론
본문내용
①경신환국(숙종 6년)
숙종 초년 갑인예송에서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된 남인은 그 내부에서 청남과 탁남으로 분립하였다. 이는 정권을 잡은 남인의 서인에 대한 대응자세의 차이였다. 온건파는 허적과 권대운등이었고 이들을 탁남(濁南)이라고 불렀고, 강경파는 윤휴와 허목이었는데 이들을 청남(淸南)이라고 불렀다. 남인들은 숙종 1년부터 나뉘어지기 시작했으나 숙종 4년 이조판서이자 청남이었던 홍우원이 이옥을 예문관 부제학에 추천한 것을 계기로 크게 분열했다. 이 사건은 청남과 탁남을 크게 다투게 했다. 두 파로 나뉜 남인은 급기야 허목이 허적을 탄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판중추부사 허목은 숙종 5년 차자를 올려 영의정 허적을 탄핵하고 나섰다.
남인의 두 거두가 충돌하자 그 옭고 그름을 판정할 사람은 임금 숙종밖에 없었다.
②기사환국(숙종 15년)
경신환국으로 경쟁자인 탁남이 제거된 뒤 김석주를 중심으로 하는 훈척이 병권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훈척은 서인으로부터도 남인 퇴치의 공을 인정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 무렵 정치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어 있던 숙종으로부터도 신임과 비호를 받고 있었다. 훈척은 정치적으로 그 지위가 크게 부상되어 거의 독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10월에는 전병사 김환 과 출신 김중하의 고변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조사 결과 허새는 모역을 생각한 것은 사실이나 이덕주에게 말했더니 그는 신중을 기하자고 했던 정도에 그쳤을 뿐이라 말하고, 나머지 혐의 사실은 전부 부정하였다. 이 사건 처리를 놓고 김석주는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장했고, 이상진은 적당히 마무리지을 것을 주장하는 등 대신들간에 의견이 엇갈리다가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 쪽으로 끝났다.
③갑술환국
기사환국으로 중앙 정계에 다시 등장한 남인은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등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노론과 소론이 함께 중앙 정치 무대에서 패퇴하여 견제 집잔이 없는 상황에서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시키는등 정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남인과 당시 왕비 장씨의 친정가가 연결되었다. 역관출신으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장씨가의 인물들은 서울 중심부에 거대한 누각을 짓는 등 두드러진 행위를 하였다. 남인과 장씨가의 이러한 행태는 숙종에게는 달가운 일일 수가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