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 격구의 역사와 유래
- 최초 등록일
- 2005.01.06
- 최종 저작일
- 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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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대학교 교양체육시간에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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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대부터 성행하던 유희의 일종으로 당의 현종이 타구(打毬)하고 돌아왔다는 시가 있어 유명하다. 타구(打毬)는 격구와 같은 말이다. 이러한 격구는 고려 초기에도 성하여 구장(毬場)을 만들었으며 호유(豪遊)한 의종은 격구의 명수로서 궁중의 구장에서 신하들과 어울려 즐기었다. 이것은 승마술이 우수한 사람이라야 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려말 공민왕 때 이성계는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며 여러 가지 술법을 잘 발휘하여 모든 사람을 감동케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개국 이후에는 격구를 장려하지 않고 구장도 만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격구는 기녀까지 동원하여 노는 등 호화스러운 노름이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세종때는 격구를 재흥하여 군사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여 세종 9년(1427) 3월에는 총제(總制)문효종(文孝宗)과 훈련관제조(訓練觀提調)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격구를 조교(調敎)케 하고 격구장 30개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격구가 조선왕조에서 재흥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월(1427) 10일에는 사간원에서 격구가 불가하다고 상계(上啓)하였다. 그 이유는 고려말에 이르러 유관희학(遊觀戱謔)이 되어 호협(豪俠)한 풍조만 조장할 따름이며 선유 주자도 타구를 무익한 것이라 하였으니 중지하라 하였다. 그래도 왕은 '어찌 폐해만 있다는 말이냐 무사들에게 무예를 배우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하며 강행하였다. 그리고 왕은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기사(騎射)와 격구를 관람하였다. 격구는 기술이 발달될수록 구를 막대기 즉 격구봉으로 치면 구문으로 나가 다시 들어 맞고 되돌아와 말의 두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등 그 술법이 다양하였다.
참고 자료
마사회 사이트 / 스포츠의 역사와 유래 / 인터넷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