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봉건사회의 재편
- 최초 등록일
- 2004.12.26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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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공과목에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농민의 동향과 신흥사대부의 등장
-농업생산력의 발전
-농민의 동향
-신흥사대부의 등장
2. 조선의 건국과 지배구조의 정비
-조선의 건국
-지배기구의 정비
-농민지배방식의 정비
3. 농민의 사회경제적 처지
-농민의 계급구성과 신분
-농민의 부담
-지배구조 재편의 의의
*전시과제도
본문내용
농업생산력의 발전 - 14세기에는 지력을 유지 강화하는 기술이 여러 방면에서 개발되었다. 거름, 제초(除草)기술, 연작상경(連作常耕), 종자개량, 볍씨도입과 같은 기술이 발달하였고 논이 많아지고 벼농사의 비중이 높아지자 농민의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논농사에서는 볍씨를 무논(水田)에 바로 뿌렸고 논이 늘어나고 벼농사가 발달하자 농업생산에서 쌀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밭농사에서는 경지 이용방식이 발전하여 갔는데 사이짓기(間種法), 그루갈이(根耕法), 1년 2작, 2년 3작이 삼남지방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농업생산의 바탕은 농민들의 노력과 경험이었다. 농업발전은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확대하고 지주제가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농민의 동향 - 고려 말에는 유망(流亡)을 비롯한 인구이동이 많았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기본적으로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지가 많고 농사에 유리한 곳으로 농민들이 옮겨가는 데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부세부담에서 벗어나려고 유망이나 농장에 투탁(投托)하였다. 이는 한 토지의 주인이 6, 7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한 권세가에 의지하여 그나마 자기 몫을 지키려는 농민의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부세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민이 유망하면 향리들도 차례로 유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을 자체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인구이동은 농민통제와 그에 바탕을 둔 군현제의 틀을 크게 동요시켰다. 그리하여 농민을 안집(安集)시키기 위한 감무(監務) 고려시대에 지방의 군 ·현(郡縣)에 파견한 관직.
가 대거 파견됨에 따라 속현(屬縣)이 줄어들고 향 ⁃ 소 ⁃ 부곡은 일반 군현으로 개편되어 갔다. 인구이동과 군현제의 변화로 향촌사회구조도 크게 변화하였으며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력이 고르게 발전하고 마을이 커져 자연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