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중국의 항일전쟁
- 최초 등록일
- 2004.12.15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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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Ⅰ. 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대응
Ⅱ. 국민정부의 항전체제
Ⅲ. 변구의 형성과 전개
Ⅳ. 항전체제의 국공의 대립
1. 국민당의 독재체제 강화
2. 헌정운동
3.변구의 확대와 국공의 대립
Ⅴ. 세계대전으로의 확대
1. 항일전쟁과 국제관계
2. 국민정부의 동요와 중공의 성립
맺음말
본문내용
들어가며
중국사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항일전쟁’ 분야도 대체로 중국학계와 일본학계의 연구가 질과 양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이 중일 양국이 전쟁에서 ‘반침략(反侵略)’과 ‘침략’ 즉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것 때문에 연구에 ‘감정’과 ‘피해의식’이 내재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각국이 주력하는 연구 방향이 다르게 나타날뿐더러 중국 내에서도 (일본침략에 대항한 주체인 중국이 국공합작을 했다는 측면에서) 항일전쟁에 대한 평가가 복잡하고 상반된 입장을 띄기 까지 한다.
항일전쟁사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것 중에 전쟁의 기간 문제가 잇다. 이는 전쟁의 성격과도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9․18 사변(滿洲事變:1931), 7․7사변(蘆溝嬌事變::1937), 일본의 대영미 선전 포고(1941.12)를 계기로 삼아 여러 견해가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대체로 ‘8년 전쟁’이라 하여 7․7 사변부터 1945년 8월까지로 보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이것을 8년 전쟁으로 한정하고,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일반민중의 항전의지를 어떻게 조직해내고 이끌어 갔는가를 염두해 두면서 살펴보자.
Ⅰ. 전쟁(戰爭)의 발발(勃發)과 중국(中國)의 대응(對應)
1937년 7월 7일 밤 북경부근 노구교에서 누군가의 발포를 빌미로 일본군 1개 중대가 중국군을 공격했다(蘆溝嬌事變::1937). 이에 노구교를 수비하고 있던 송철원의 제 29군은 일본군 공격에 격렬히 저항함으로써 이후 8년간의 중일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현장에서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7월 11일, 29군 대표 장자충(張自忠)은 일본측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