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돌에 대한 애정-바위에 나타난 풍경
- 최초 등록일
- 2004.12.10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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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장 서 론
제 2장 바위와 인간의 관계
제 3장 바위의 종류
제 4장 우리 풍경 곳곳에 나타난 바위의 모습
Ⅰ. 서산 마애불에 나타난 신앙의 의미로서의 바위
Ⅱ. 울산 바위의 전설에 나타난 민중의식
Ⅲ. 장승에 나타난 바위의 모습
Ⅳ. 하르방에 나타난 민족의 모습
제 5장 결론
본문내용
한국인의 돌 특히 바위에 대한 애정은 유별나다. 지금도 특출한 형태의 바위에 치성을 드리는 행위가 여전하며, 바위에 구멍을 내는 성혈 (性穴)이나, 바위 면에 이름 쓰기 같은 무속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명산의 정상이나 깊은 계곡 특정 바위의 정령을 믿고 거기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여 제의(祭儀)를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바위의 일부를 떼내어 마을로 옮겨다 놓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동해 온 선돌(立石)은 경계를 표시하거나 성역임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설치의 기원은 대체로 농경 문화와 계급하회가 뿌리를 내리고 고인돌 무덤을 쓰던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巨石文化)에서 찾는다. 이후 마한의 신성한 터' 소도(蘇途)에 관한 기록이 그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 사회인 신라-고려 시대에는 불국 성역인 사찰의 입구 내지 영역 표시석으로 장생(長生)을 세웠다. 신라말 보림사 보조선사비에 밝혀진 대로 경덕왕 때 세웠다는 '장생표주(長生標柱)'의 명문(銘文), 고려 시대의 실물로 통도사 국장생과 도갑사 국장생(國長生), 황장생(皇長生)등이 전한다. 벅수라고도 불리는 장승은 남근석과 같은 성신앙적 조형물, 혹은 선돌이나 돌무더기 등과 그 기능이나 의미에서 천영성을 지닌다. 돌을 세우는 형태감이 유사하고, 동제의 중심이 되거나 마을 지킴이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참고 자료
오재숙,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돌’의 상징성 연구』,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
이종철, 『한국 性신앙 연구 :한국인의 性표상과 의미에 관한 연구』,영남대 대학원, 2001
정웅천, 『설악산 울산바위 주변의 Tor에 관한 연구』, 강원대 교육대학원, 1994
우일제, 『 소설 '바위' 의 구조 연구』, 숭전대,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