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현대 친일 논리와 존재양상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4.12.01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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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19C 말의 ‘친일’ 논리와 실태
Ⅲ. 1905~1919의 친일파와 그 논리
Ⅳ. 1920년대 친일파와 친일논리
Ⅴ. 1930년대 친일논리와 배경
1. 조선인 유산층의 친일논리와 배경
2. 한국인 관료의 충원양식과 반민족적 성격
Ⅵ. 해방 직후 남·북한 친일파숙청
민족 운동의 발자취 <10조> 1. 남한의 친일파 숙청
1) 정당통합운동기 (1945~1946 초)
2) 신탁통치파동기 (1946~1947 말)
2. 북한의 친일파 규정과 처리과정
1) 친일파의 규정
2) 친일파 처리과정
Ⅶ. 친일. 해방후 50년, 그리고 현재
1. 친일청산의 실패 (해방후~1949)
2. 6·25전쟁과 반공 (1949.9~1964)
3. 본격적인 친일연구의 시작 (1965~1979)
4. 친일청산에 대한 의식의 확산 (1980~1999)
5. 친일청산의 현재
1) 친일인명사전
2) 친일진상규명법
3)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4) 친일재산환수 특별법
Ⅷ. 맺음말
※ 부록 - 친일파 군상
본문내용
물론, 이들 유학생들 중에서 친일파가 많이 나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을사보호조약 이전 시기까지의 ‘친일파’문제는 구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 선택의 문제로 보는 것이 역사적 실체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일본 유학의 움직임은 1877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조선 내부에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를 양성하기 위해 양반 자제를 일본에 유학시키고자 하면서 출발한다. 당시에 조선정부는 이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는데,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1880년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승려와 고위 관직자와 만나 접촉하면서 이후 2차 수신사로 온 김홍집에게 적극적으로 유학생 파견을 건의했다. 이어서, 일본의 지속적인 유학생 파견 건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결국 1881년 그 실현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기 일본 유학생의 상당수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는데, 3일천하로 끝난 거사의 실패로 인해 이들의 대부분은 근대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참고 자료
1) 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란 무엇인가》, 아세아문화사, 1999.
2) 임종국,《친일, 그 과거와 현재》, 아세아문화사, 1994.
3) 김상웅,《친일파》, 학민사, 1992.
4)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 99인》, 돌베개, 2002.
5) 임종국,《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6) 이송희,『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신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2.
7) 이강수,『해방 직후 남 · 북한의 친일파숙청 논의 연구』, 전남사학회, 2003.
8) 박세길,『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2,3』돌베개, 1999.
9) 대한매일 주간연재, ≪친일파 군상≫ 98.8-99.4
♠ 참고 사이트 ♠
1)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
2)월간 말지 http://www.digitalmal.com
3)오마이 뉴스 http://www.ohmynews.com
4)민족문제연구소 http://www.banmin.or.kr
5)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http://truefinder.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