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장작림 폭살사건과 군부의 발호
- 최초 등록일
- 2004.11.18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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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별발표한 발표문입니다.
목차
1. 경제의 혼란 - 금융공황
2. 장작림 폭살사건
3. 당시 일본 정부의 이에 대한 대책 반응
4. 세계 경제 공항과 쇼와 공황
5. 일본 군부(軍部)의 발호
6. 만주사변
본문내용
장작림 폭살사건 (1928)
다나카 육군대장이 내각을 조직하여 외무대신을 겸함으로써 일본외교는 시데하라의 협조외교에서 다나카의 적극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다나카 내각과 일본 군부는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시장개척이 필요하며 일본의 자본을 중국에 투입시켜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의 민족운동은 국민당의 주도하에 끊임없이 계속되어 1921년에는 광동에 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각지에 강력한 군벌들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북방군벌의 토벌에 나섰다. 국민정부군에 의한 북벌이 시작되자 일본은 산동성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1928년 4월 북벌재개와 함께 다시 4천의 군대를 증파하였다. 장개석은 북벌을 재개하면서 일본과는 화해정책을 취함으로 거류민 보호에 힘을 기울였지만 일본의 병력증파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장개석은 우회하여 북벌을 계속하였고 6월 9일 북경에 입성하게 된다. 7월 7일에는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내외에 선언, 일단 북벌을 끝마치고 ................................. 장개석의 북벌군이 1928년 4월 다시 북벌을 재개하자, 장작림은 일본의 권유로 장개석과의 싸움을 피해 북경을 떠났다. 6월 3일 북경을 내주고 만주로 복귀하던 도중, 6월 4일 북경을 떠나기 위해 장작림이 탔던 열차가 봉천역에 들어오기 직전 폭파되어 치명상을 입은 장작림은 사망했다. 이날 현장 부근을 경비하던 일본군이 북벌군 차림을 한 2명의 아편 중독자를 사살하였으나 그들은 관동군이었다. 이 사건은 만철 등의 만주 현지 세력과 자주 충돌했던 장작림을 제거하고 혼란을 틈타 만주를 점령하여 직접 지배하기 위해 관동군의 고급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와 그 일파가 꾸민 음모극 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