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고려사회에 미치는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4.10.29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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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열심히 정리한 자료니깐, 많은 참고 바랄게요..
목차
1.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국내외 정세
2. 서경파와 개경파
3. 서경천도의 실패의 원인
4. 묘청의 반란
5. 고려의 북진정책 좌절
6. 고려사 묘청
7.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
8.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
본문내용
4. 묘청의 반란
서경천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1135년 정월에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 동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부유수 이하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은 물론 그 밖에 상경인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이와 함께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고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라고 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임명, 그에게 반란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정지상·김안 등을 처형하고,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 헙력하게 되어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김부식은 7∼8차례에 걸쳐 서경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항복을 결심, 묘청·유담·유호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정부는 윤첨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해도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고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해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강을 따라 성을 쌓고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반란군은 1년 넘게 완강하게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져 1136년 2월 정부군의 총공격으로 서경성이 함락되어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