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탐구] 박지원 탐구
- 최초 등록일
- 2004.10.14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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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2. 시대적 배경 및 문체반정
3. 박지원의 문학관
4. 연암의 이용후생
5. 연암의 작품으로 본 실학사상
본문내용
연암 박지원(1737~1805)은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에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야동에서 반남(潘南) 박씨 사유(師愈)와 어머니 함평윤씨(咸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열상외사(洌上外史)라고 하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유안재(遺安齎) 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든 뒤, 유안재에게서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이양천에게서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3년 남짓한 사이에 경사·백가서를 두루 통달하고 천문·지리와 경세요무를 강구하였다.
1765년(영조 41)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 백탑 근처로 이사하게 되어 박제가·유득공·이서구·서상수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이 교유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이덕무·정철조등과도 이용후생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다. 특히 30세 때에는 전년에 연행하고 돌아온 홍대용과 교유하면서 청나라의 실정과 국제정세, 그리고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 학문에 접함으로써 마침내 북학에 뜻을 두었다.
1777년(정조 1)에 세도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인 홍낙성의 일파로 몰려 신변에 위협이 있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피신하여 지내다가, 1780년(정조 4)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 박지원의 연행은 그가 당시 집권층인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학맥은 노론에서도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 계열에 속한다. 그와 동종인 박윤원은 홍대용과 함께 미호 김원행에게서 동문수학한 처지로 박지원의 집안과는 친근한 사이였고, 박지원의 숙부 박사근은 낙론을 거두였던 여호 박필주의 양자였다. 또 그의 고모가 김창협의 고제 기원 어유봉의 집안으로 출가하였으며, 그 자신은 어유봉의 고제이며 사위인 유안재 이보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처가까지 당시 낙론의 중요 인물이었던 김창협 및 어유봉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하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용후생 할 수 있는 시책을 내놓았는데, 이 시책을 담은 책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1786년(정조 10)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된 뒤, 이어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 등을 지내고, 안의현감(安義縣監)·면천군수(沔川郡守)를 거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있던 1801년(순조 1)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연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를 남겼다.
참고 자료
김일렬, 『고전소설신론』(새문사, 2001)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한양대학교출판부, 2000)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시대』(푸른역사, 1998)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 2001)
정옥자,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돌베개, 1999)
한국사상사연구회, 『실학의 철학』(예문서원, 1996)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실학사상사』(다운샘, 2000)